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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포럼

Ex Ma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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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에 지어진 ECCC 건물의 모습은 필자가 20년 전에 근무했던 지방법원 지원의 모습을 닮았다. 낡은 외관과 시설은 물론이고 엘리베이터가 없어 무더위 속에 4층 사무실까지 걸어 올라와야 한다. 전기가 수시로 끊기기도 하고, 우기에 주변 일대가 침수되면 임시 가설한 나무 다리를 이용해야 하는데 사무실 안에서는 각종 파충류를 비롯한 풍부한 생태계가 구현된다.


사무실 컴퓨터 역시 오래된 미니 컴퓨터로서 최소한의 작업만 할 수 있는 저사양의 것이고 외부 프로그램을 추가 설치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만성적 예산 부족 상태에서 이러한 시스템을 전면 업그레이드하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낡은 시스템으로도 방대한 규모의 수사와 재판을 전자문서 기반으로 진행하는 데에 별다른 어려움이 없다. 예를 들면 필자가 현재 담당하고 있는 한 사건의 기록(Case File)에는 모두 3만 3천여 개의 문서가 전자파일 형태로 관리되고 있다. 각종 수사서류와 증거서류가 체계적으로 분류되어 비밀등급에 따라 접근권한이 정해져 있고, 진술 증거의 경우에는 녹음 또는 영상 파일도 함께 보관되어 있다.

범죄혐의자는 '수사개시통보(Mise en examen)'와 동시에 피의자로 전환되고 그때부터 기록 파일에 대한 접근권한을 가지게 된다. 그 후 이루어지는 수사행위의 결과물 역시 계속 업데이트되어 당사자에게 제공되며, 피의자가 기소될 경우에는 이 파일이 재판부에 그대로 전송되어 증거제출의 기초자료가 된다. 그럼에도 이곳의 변호인들은 수사기관이 수사개시통보를 늦추는 방법으로 기록에 대한 접근을 지연시킴으로써 방어권[국제규범상 피의자에게는 방어준비를 위한 충분한 시간과 적절한 수단이 주어져야 한다. Art. 14(3)(b) ICCPR, Art. 6(3)(a) ECHR] 이 침해되었다고 다투고 있다.

반면 필자가 2015년 한국의 형사 재판부에서 근무할 당시에는, 재판부조차 하나뿐인 종이기록의 행방을 찾아 사무실에 미리 확보해 두는 것이 재판준비의 지상과제였으니, 당사자들의 기록 접근 기회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이러한 상황은 현재 캄보디아에서도 스마트폰을 통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차량공유서비스가 한국에는 쉽게 도입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과 유사한 배경을 갖고 있다.

특히 약 15년 전 의욕적으로 출범하였던 범정부적 형사소송전자화 프로젝트에서 조서의 폐지, 전자영장 등을 포함하여 종이 기반 절차 자체를 바꾸는 혁신적 계획이 검토되었으나, 이견 노출 끝에 결국 형사사법포탈 등 제한적 범위의 전산화 구현에만 그친 후 관련 논의가 장기간 정체되어 있는 점은 아쉬운 일이다.

고대 이집트 이래 15세기 유럽에 이르기까지 필경사(scrivener)는 모두가 선망하는 고소득 전문직이었지만 인쇄술의 발전에 따라 점차 소멸하게 되었다. 그 당시 독일의 수도원장 트리테미우스는 '필경사 예찬(De laude scriptorum manualium)'이라는 책을 저술하여 필사 작업의 중요성을 역설하였으나, 그 자신은 이 책을 인쇄하여 출판하는 쪽을 택하였다.

오랜 기간 고착화된 플랫폼을 바꾸는 일은 그 바탕을 이루는 법 제도와 긴장 관계에 있고 이익을 얻어 온 사람들의 불만도 따르기 마련이므로 장기적이고도 치밀한 계획과 세심한 이해관계의 조율이 필요하다. 아쉽게도 이를 단번에 해결해 줄 전지적이고도 기술적인 해법(Deus ex machina)은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은 듯 하다.


백강진 재판관 (크메르루즈 특별재판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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