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서초포럼

법률실무의 크레바스(crevasse)

152353.jpg

크레바스(crevasse)란 빙하 표면에 갈라진 틈을 뜻하는 말이다. 빙하가 이동하면 이동력을 이기지 못하고 갈라지게 되면서 크레바스가 형성된다고 한다. 고산 등반이나 극지 탐험 시 크레바스에 빠져 조난을 당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등반 시에는 항상 조심해야 하며 특히 크레바스가 눈에 덮힐 경우 육안으로 확인하기 힘들므로 더욱 조심해야 한다. 윗부분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자칫 잘못했다가는 크레바스인줄 모르고 발을 잘못 딛다가 추락해 시신도 찾지 못한 채 순간에 세상에서 사라지는 사례도 적지 않다고 한다. 


우리 법률실무에도 매우 위험한 크레바스들이 여러 분야 도처에 널려 있다. 항소나 항고 등 불변기간이나 사해행위 제척기간 혹은 소멸시효 기간을 도과하는 경우는 물론, 부동산이나 채권집행에서 배당요구 종기도과, 파산이나 회생절차에서 채권신고기간 도과, 채권(가)압류 과정에서 채무자의 제3채무자에 대한 채권이 여러개 임에도 이를 구분하여 특정하지 않고 (가)압류 하였다며 무효가 되는 경우 등등. 그러나 신이 아닌 이상 모든 것을 알 수 없는 일이고, 그렇다고 그 모든 위험을 누가 알려주거나 배우는 것도 아니며, 늘 조심하고 유의하면서 업무를 한다고 하지만 가끔씩 가슴을 쓸어내리는 경험을 할 때도 있다.

얼마 전 모 법무사 사무소에서 전화로 대화를 하면서 알게된 사실이 있는데, 동산채권 담보등기를 한 후 5년이 지나도록 갱신 등기를 하지 않으면, 피담보채권이 존재하여도 그 담보권 자체가 소멸해버리며, 담보물에 대하여 담보권실행도 하지 못하고 우선 변제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동산·채권 등의 담보에 관한 법률 제49조). 상식적으로 피담보채권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갱신등기를 하지 않으면 5년 후에는 담보물권 자체가 소멸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피담보채권과 담보권의 주종관계가 뒤바뀐 느낌이다. 묵시갱신 같은 것도 없다고 한다. 사실 동산채권담보 등기는 도입된 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심지어 전문가에게도 제도 자체가 생소한데, 게다가 이러한 동산 채권 담보권 자체가 소멸하는 규정까지 있다니 당혹스러울 수 밖에 없는 또 하나의 크레바스인 것으로 느껴진다. 이 제도는 당초의 법률안과는 다르게 국회통과 과정에서 이러한 내용으로 수정된 것이라고 하는데, 다행히 이 제도에 대하여 개정을 진행 중이라고 하는 것 같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의 기본적인 책무는 도처에 널려 있는 이러한 제도의 위험성과 크레바스들을 숙지해서 당사자들이 피해를 보는 일이 없도록 하고 전문적으로 업무처리를 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러한 제도의 함정이나 크레바스가 생겨나지 않도록 제도 자체를 잘 만들고 정비하는 부분에도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러한 내용도 몰랐느냐고 탓하기 전에, 심지어 전문가들도 이해하기 어렵고 알기 어려운 크레바스를 그것도 인위적으로 만드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리고 가사 실수로 크레바스에 빠졌더라도 그것을 탓할 것이 아니라, 가능하면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주도록 제도를 보완하는 부분에도 관심을 기울어야 할 것이다.


이천교 법무사 (경기북부회)
리걸에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