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法臺에서

판사의 절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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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으로부터 용돈을 자주 받지 못하던 시절, 설날이 너무 좋았다. 아침 일찍 세배를 하면 할머니는 꼬깃꼬깃 아껴두었던 용돈이나 사탕을 흔쾌히 내어 주셨다. 그 절값을 받을 마음에 들떠 아침 일찍 일어나 깨끗하게 세수를 하고 공손히 절을 했던 기억이 또렷하다.


법대에 앉아 하루에도 수십 건씩 진행되는 사건을 지켜보자면 법정에 들어오고 나가는 당사자나 대리인들의 모습에도 눈길이 간다. 흥미로운 것은 재판장이 아닌 합의부 구성원이다 보니 그러한 모습이 보다 자세히 보인다는 것이다. 그 중에 유난히 재판정에 들어오고 나갈 때 법대를 향해 정중히 예를 표하는 분은 눈에 뜨이기 마련이다.

사실 법정 출입에 있어 예의를 갖추도록 하는 것은 여러 나라에 있는 일이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높이 보장된다는 미국에서도 연방법원 판사가 입정하는 순간에는 법정에 임한 누구든 매우 엄격한 예를 표하도록 하고 있으며, 텍사스 어느 연방법원에서는 정장을 입고 오지 않은 당사자는 입정이 제한되어 심지어 정장을 대여해 주고 있기도 하다.

사실 내가 젊은 나이에 판사라는 직분을 부여받고 법정에 처음 임하게 되었을 때, 누구나 일어나 재판부를 향해 인사를 하는 모습에 잠시 우쭐했던 기억이 있다. 그러다 조금 연차가 쌓이고 나서는 판사보다 더 연로한 당사자나 변호사가 연소한 판사의 재판을 위해 일어나는 것은 한국의 예절 문화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에 일견 공감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러한 생각은 오래 가지 못했다. 법정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절(拜)로써 예를 표하는 대상은, 판사 개인이 아니라 바로 재판 하나 하나를 지켜보며 매 순간 법정을 엄숙히 지키고 있는 우리의 국기였음을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십여년이 넘게 법정에 서게 된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재판을 위해 법대에 들어서는 순간 나를 지켜보는 태극기의 장엄함과 헌법과 법률이 정한 판사의 직분에 대한 국민들의 절값을 늘 가슴에 품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은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김영기 판사 (서울중앙지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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