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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수첩

[취재수첩] '빠른 재판'이 능사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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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는 AI(인공지능)가 아닙니다." 사법행정권 남용 혐의로 기소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재판 과정에서 변호인이 한 말이다. 임 전 차장의 공판기일을 지정하는 과정에서 기록 검토에 필요한 시간을 달라는 변호인의 호소에 검찰은 '재판지연을 위한 전략'이라고 비난했다. 임 전 차장 관련 사건 기록은 20만 쪽에 달한다. 변호인은 "변호사를 한 지 10년이 됐지만 여지껏 맡았던 사건의 수사기록보다 많다"고 토로했다.


임 전 차장의 재판 과정에서 검찰은 "구속기간 6개월 중 3분의 2가 흘렀는데도 피고인 측은 기록 검토를 진행한다는 변명만 해왔으며, 피고인의 절차진행 방해로 인해 구속기간 내에 전체 공소사실 중 25%의 심리도 마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고 우려했다. 그러나 수십 명의 검사가 투입돼 진행되는 재판에서 소수의 변호인이 6개월 안에 20만 페이지에 달하는 기록을 파악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심판 사건의 기록은 5만여 페이지에 달했는데, 헌법재판관들은 기록을 읽는 데만 꼬박 50여 일이나 걸렸다고 한다. 최근 취재 현장에서 만난 법조인들은 "검찰이 수개월 공들여 준비한 사건을 6개월 안에 모두 파악해 방어를 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재력이 충분해 대형로펌 등에서 충분한 인력의 변호인을 선임한다면 모를까, 인건비부터 감당이 어려울 것"이라거나 "변호인 뿐 아니라 재판부가 방대한 기록을 6개월 내 파악하는 것 또한 불가능에 가깝다"고 입을 모았다.

형사소송의 목적은 '실체적 진실'을 밝히는 것이지, 6개월 안에 재판을 끝내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구속기간이 만료되기 전에 선고를 하지 않으면 큰 잘못을 하는 것 같은 분위기가 만연하다. 유·무죄 판단으로 피고인의 인생이 엇갈리는 상황에서 실체적 진실을 다투는 대신 '빠른 재판'만이 목적이 된다면 이것이야말로 '주객전도(主客顚倒)' 아닐까.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기본권은 모든 국민이 누려야 한다. 사안이 무엇이냐, 피고인이 누구냐에 따라 법과 원칙이 바뀌어서는 안 된다. 1996년 '12·12 및 5·18사건'과 관련해 내란죄 등 중죄 혐의로 구속기소된 황영시, 이학봉, 유학성 피고인 등도 1심 구속만기일인 6개월이 다가오자 풀려난 뒤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은 바 있다. 형사재판에서 '6개월 내 선고'가 목적이 아니라, 실체적 진실의 확인에 초점이 맞춰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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