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서초포럼

문은 셀프

151687.jpg

나이를 먹다 보니 젊은 사람들로부터 대접을 받게 되면 마음이 뿌듯해질 때가 있다. 간혹 문을 열어주거나 식사 때 수저를 놓아주면 처음에는 황송하다가도 이내 익숙해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법원 구내에서는 종종 배석판사나 재판연구원들이 행여 동선이 끊길까 부장님 앞으로 나는 듯이 달려나가 문을 열어드리는 광경을 보게 된다. 얼마 전 법원 게시판에 합의부를 위한 제안으로 ‘엘리베이터, 문열고 닫기 등은 가급적 돌아가면서 하자’는 의견이 게시된 것을 보면, 이를 행하는 입장에서는 고충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참고로 법원장까지 지낸 우리 부 재판장께서는 이 모든 것을 스스로 하신다).


과공(過恭)은 비례(非禮)라고 하지 않았는가. 지나친 공경은 법관의 현실감각을 없애고 그 마음을 너무 높게 만들 것 같다. 법원에 오는 사건들은 내가 상상하거나 경험하지 못한 각계각층의 사람들과 사정으로 이루어져 있어, 법관이 현실세계에 발을 붙이고 있지 않다면 건강한 판단이 어려우리라 생각된다. 문 하나 스스로 열기 어려울 정도로 높아진 마음이 어떻게 법대를 내려와 국민들의 사연에 귀기울일 수 있을까. 법관이 스스로를 너무 높게 여겨 겸손을 잊는다면, 재판당사자 중 가장 사건의 실체를 모르면서도 그만의 독단에 빠질 우려가 클 것 같다.

지나친 공손함이 합의부의 업무영역에까지 미친다면 과연 자신의 소신을 지켜 실질적인 합의를 이룰 수 있을지 우려가 되기도 하다. 소위 ‘벙커’의 탄생에는 ‘1년만 참으면 된다’고 인내하면서 폭탄을 돌려왔던 축적의 시간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여러 선배님들과 근무하여 봤으나, 개선되어야 할 점을 차분히 말씀드리면 듣지 않는 분이 안 계셨던 것 같고, 오히려 얘기를 해줘서 알게 됐다며 고마워한 분도 계셨다. 필자도 주위의 충언으로 업무상 오류를 바로잡거나 사회가 변했다는 큰 깨달음을 얻은 적이 적지 않다. 그런데 그 관계의 기울기가 수직에 가깝다면, 상대방이 신뢰의 대상이 아니라 공포의 대상이라면 허심탄회한 진언은 불가능할 것 같다.

법원조직법상 판사 사이의 직급이 사라졌으나, 최근까지도 법원 공식 행사에서 직급에 따라 자리를 구분하여 지정하고 있고, 지정이 되지 아니한 경우에도 어느새 보이지 않는 금이 형성되어 서로 감히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선배에 대하여 예의를 갖추는 것은 법관을 떠나 인간으로서의 도리일 것이다. 그러나 사법부가 종래의 수직적·관료적 구조를 극복하고 수평적이고 민주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합심해야 할 시기에, 같은 자리에 서거나 앉을 수도 없고 서로 허심탄회하게 마음을 나눌 수도 없는 유무형의 벽을 만들고 이를 유지해서는 안 될 것 같다.

누군가로부터 받는 공경이 나의 권리처럼 느껴질 때, 쓴소리를 듣기가 힘들어질 때, 나의 마음이 대지를 떠나 높이 떠오를 때마다 초심을 되돌리며 이렇게 되뇌어 보자. “문은 셀프”라고.


이숙연 고법판사 (서울고등법원)

관련 법조인

미국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