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서초포럼

박현의 겨울

150606.jpg

2년 전 겨울, 갑작스럽게 그의 부고를 받았다. 서른네 살의 박현은 독감과 폐렴으로 죽었다. 장례식장으로 가는 길은 멀고 힘들었다. 그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박현은 내가 진행한 소송의 원고였다. 장애인을 시설에 격리하지 않고 지역사회에 살 수 있도록 하자는 공익소송이었다.


그는 열세 살부터 16년을 음성 꽃동네에서 살았다. 뇌병변장애(뇌성마비) 중증이었던 그를 가난한 부모는 감당하지 못했고, 어린 나이에 시설에 가야 했다. 그는 시설을 나와 서울에서 자립하고 싶어 했다. 이를 위해 필요한 복지서비스를 행정청에 신청했으나 행정청이 거부했고 결국 소송을 제기했다. 서울과 청주에서 여러 명의 장애인이 두 건의 소송을 냈는데, 서울에서는 승소했고 청주에서는 졌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자립생활을 시작했다. 집들이도 했다. 건국대 입구 작은 연립주택 1층이었는데, 수급비에 의지해 중증장애인이 자립생활을 하는 것은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걱정이 많았다. 그러나 염려와는 달리 그는 참 잘 살았다. 만날 때마다 머리 색깔이 바뀌었다. 심지어 빨간색, 초록색으로 염색을 했다. 무엇보다 표정이 환해졌다. 어떠냐고 물어보면 좋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장애인 야학에 다녔고 시를 쓰기 시작했다. 시설에서는 학교를 다닐 수 없었지만 그의 시는 참 좋았다. 나는 그를 시인이라 불렀다. 탈시설 경험을 나누는 어느 인터뷰에서 그는 “누군가 내 글을 노래로 만들어 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는데, 어느 인디밴드가 그의 시에 노래를 붙였다. 그 밴드가 박현과 같이 무대에서 노래하던 공연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은 시설이라는 꽃동네에서 살았지만 그곳에서는 아무런 꿈도 가질 수 없었다. 그저 먹여주는 밥 먹고, 자고, 그렇게 죽는 것이 시설의 삶이었다. 소송 당시 그에게 받은 글의 제목은 '불쌍한 장애인이 아닌 시민으로 살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렇게 시민이 되었다.

아직 우리 지역사회는 중증장애인이 안전하고 편리하게 살기 어렵다. 요즘엔 폐렴으로 죽는 이가 드물지만 그는 폐렴으로 죽었다. 시설에서 계속 있었다면 그런 갑작스런 죽음을 피할 수 있었을까? 안전망이 잘 갖추어지지 않은 세상으로의 탈시설을 도운 나는 잘 한 것일까? 영안실에 도착했는데 수많은 장애인 친구들이 와 있었다. 그곳에서 만난 장애인들은 나를 위로했다. “변호사님, 현이는 지역사회에서 짧은 삶을 살았지만 시설에서 수십년을 연명하는 것보다 행복했어요.” 그러나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 무렵 촛불집회가 한창이었는데 김제동씨가 사회를 본 집회에서 어느 장애인이 발언을 했다. 장애인도 ‘위험할 권리’가 있다는 내용이었다. 세상이 위험하다고 장애인을 시설에서, 집에서 격리하는 것은 옳지 않다. 장애인도 위험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현이를 보내는데 도움이 되었다. 그해 겨울을 결코 잊을 수 없다.


임성택 변호사 (법무법인 지평)

관련 법조인

미국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