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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와 자비(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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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즈음 한가한 시간을 이용하여 고전 중 명작이라고 기억되는 소설을 다시 읽어보고 있다. 그 중 셰익스피어의 명작 '베니스의 상인'에서 심판관 포샤의 말 중 정의와 자비에 대하여 말한 것이 있는데, 거기에 심오한 뜻이 있고 현 세태와 관련성이 있는 것 같아 이를 옮겨보면 “자비는 하늘에서 땅에 내리는 자비로운 비와 같은 것이어서 자비를 행하는 자와 자비를 받는 자가 다 같이 축복을 받는 것이다”, “정의만을 내세우면 그 누구가 구원받을 수 있겠는가?”, “자비로 정의를 완화하면 현세의 권세는 하느님의 권세에 가깝게 되는 것이니라” 등과 같다. 이 말들은 인간사회에 있어서 정의가 최고의 가치라 할 것이지만 정의와 함께 자비 즉, 사랑과 관용도 함께 존중되어야 할 것을 말한 것으로 오늘날 다시 새겨볼 만하다.



2. 이와 함께 필자가 오래 전에 발표한 '정의보다 중한 것'이라는 제목의 수필이 이와 관련이 있는 것이어서 여기에 다시 옮겨보면,


정의는 개인과 사회가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이다. 그것은 개인에게는 행동의 지표가 되고 사회에서는 지배의 원리가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의의 내용은 지극히 상대적이다. 그것은 시대에 따라, 사회에 따라 혹은 주체적인 개인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지기도 하는 것이다.

 

정의는 그러한 속성 때문에 언제나 대립과 투쟁이 예상되며 따라서 정의는 자기 실현을 위하여 투쟁에서의 승리, 즉 힘의 뒷받침이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독재자가 온갖 불의를 자행하면서도 힘을 뒷받침하여 정의의 간판을 내세울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인 것이다.

 

그렇게 보면 '정의만이 개인과 사회의 최고의 가치이다'라는 명제는 문제가 있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인간에게 있어 정의보다 중한 가치 있는 것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먼저 개인과 사회의 존립 기초가 되는 평화가 아닌가 생각된다. 평화와 안정이 없이 인간생활이 지탱되어질 수 없는 것이 아닐까?

 

민주정치에서 그 근본인 다수결의 지배가 오히려 다수의 횡포라고 비난되고 타협의 원리가 찬양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정의의 주장에 따른 대립과 투쟁을 극복하고 평화를 이룩하자는 데 있다고 할 것이며, 법의 영역에서 시효제도가 있어 일정한 사실상태가 계속될 경우 그것이 법적 권리에 우선케 하고 심지어 범죄자의 처벌을 불가하게 하는 것은 정의보다도 평화를 존중하자는 데 그 취지가 있는 것은 너무나 명백한 것이다.

 

재판에서의 '최악의 화해가 최선의 판결보다 낫다'는 주장 역시 그러한 뜻이 있는 것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우리 인간생활에 있어 정의보다 중한 것은 평화와 함께 또 어떤 것이 있을 것인가.

 

그것은 개인과 개인을 잇고 인류로 이어가는 사람의 가슴속에 있는 '사랑'이 아닐까?

 

형법을 보면 일정한 혈연관계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들 사이의 죄를 벌하지 않고 있는데 그것은 정의보다도 그들 사이의 인륜과 사랑의 가치를 우위에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되고, 범죄자에 대하여 어떤 사정이 있을 경우 관용을 베풀 것을 허용하는 것도 사랑으로 용서하자는 것이며 또한 종교의 영역에서 볼 때 기독교에서는 사랑을, 불교에서는 자비를 최고의 가치와 이상으로 하고 있고 어떻게 보면 정의의 내용을 사랑 혹은 자비로 해석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기독교에서 정의는 강자가 약자의 입장을 ‘이해하고’, ‘주며’, ‘용서하는’ 것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닐까.

 

요즈음 우리 국민 다수는 각자 자기 나름의 가지가지의 정의를 내세워 이를 과격하게 주장하고 있다. 여기에서 개인간의 대립, 계층간의 투쟁이 만연되어 개인간에는 불화가 심화되고 사회 전반에 불안이 휩싸여지고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정의의 주장과 함께 우리 가슴속 사랑으로 서로 이해하고 사회 평화를 생각해보는 것이 어떨는지, 각자가 깊이 자성해보아야 할 시점인 것 같다.

 

 

고광우 변호사 (서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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