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法臺에서

여백(餘白)과 공백(空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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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삶인들, 누구의 인생인들 바쁘지 않고 힘들지 않겠는가마는 내 삶조차 제대로 건사하지 못한 채로 타인의 삶에까지 관여해야 하는 법조인의 일상은 누구보다 분주하고 여유가 없다. 대부분의 법조인들은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일분, 일초를 아껴가며 쉴 틈 없이 일하기 마련이고, 잠시의 공백이라도 주어질라치면 불안한 마음에 혹시 오늘 할 일 중 무언가 놓친 것은 없는지 고민하느라 결국 그 공백마저 꽉꽉 채워 하루를 보내곤 한다. 판사들의 경우에도 10분 단위로 오전, 오후에 빽빽하게 재판기일을 지정한 다음, 수 십여 건의 사건들을 빈틈없이, 완벽하게, 일사천리로 진행한 후에야 비로소 한 숨 돌릴 여유가 생긴다. 일반적으로 법조인은 으레 사건을 완벽하게 파악하여 정확한 결론을 내린 다음, 상대방의 어떠한 주장도 빈틈없이 방어해내는 동시에 확고하게 자기주장을 펼칠 수 있는 철두철미한 존재로 인식되어 왔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마음 한편, 일상의 어느 한 자락 바람이 쉬어갈 자리를 비워둔 사람은 행복하다. 그 자리에 어디 바람만 왔다 가겠는가. 생각의 여백이 넓을수록 담을 것도 많아지는 법. 텅 비우고 있어야 거기 울림이 있다. 이것저것 다 채우고도 빈자리 하나쯤은 남겨둬야 삶이 숨 쉴 수 있다. 진정한 소통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나에게 기꺼이 다가 와 자기 속내를 꺼내놓게 할 수 있어야 가능한 것인데, 여백이 있는 사람이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은 보편타당한 정서이다. 여백은 단순히 아무것도 없이 비어있는 상태의 공백이 아니다. 여백은 단단한 중심이 선 다음에야 비로소 가능한 자기 자신에 대한 소박한 허용이고 믿음이며, 상대방에 대한 무한한 겸손이고 배려이다. 매사에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조금 헐렁해도 아무 문제없다. 일상의 무의미하고 무책임한 공백(空白)을 경계하느라 삶의 여백(餘白)마저 놓치지는 말아야겠다.

프린스턴 대학교의 경제학 교수인 팀 페리스는 최근 그의 저서 'Tribe of Mentors'에서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세계 석학 133명이 공통적으로 다음과 같이 조언하고 있다고 말한다.

“애쓰지 말기를. 모두, 느긋하게 마음먹기를.”

지금 이 순간에도 바쁘게 하루하루를 버텨나가고 있을 그대에게, 힘에 부쳐 깊은 한 숨을 몰아쉬면서도 어느 것 하나 내려놓지 못하고 있는 나에게, 우리 너무 애쓰지 말자. 그 정성만으로 충분하다.


이은혜 판사 (서울동부지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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