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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포럼

용서는 그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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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여년 전만 해도 집행유예 판결을 선고하면서 “피해자와 합의하였으므로, 이번에 한하여 한 번 용서하고… ”라는 멘트가 사용되었었다. 당시로서는 드물지 않은 예이나, ‘과연 누가 누구를 용서한다는 것인가, 법관에게 피고인을 용서할 권한이나 자격이 있는가, 국가나 사회는 피고인을 용서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품게 되었다. 


대법원 양형기준은 다수 범죄에서 피해자의 처벌불원의사를 특별양형인자(행위자/기타인자) 중 주요 감경요소로 삼고 있다. 개인적 법익을 침해하는 범죄에서 피해자의 처벌불원의사가 제출될 경우 상대적으로 낮은 형량이 선고되고 집행유예 판결의 비중 또한 높다는 것이 주지의 사실이다. 아마도 침해되었던 개인의 법익이 회복되고 피해자가 행위자를 용서하였다면 법익보호의 최종 수단인 형벌은 자제해도 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깔려 있는 것 같다.

형사사건에 드러난 범죄의 악성을 색깔에 비유한다면, 사건발생 당시 검붉은 색을 띠던 사건이 검찰과 법원을 거치면서 선홍색에서 분홍색으로까지 변화되는 과정을 목격하게 된다. 피해자와 합의까지 하게 되면, 어느덧 순백에 가까워 보이기도 한다.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양형을 정할 것인지, 양형인자 중 행위인자에 주목할 것인지, 행위자/기타인자에 주목할 것인지는 고민스러운 지점이다.

살인죄에서 진정한 용서는 피해자만 할 수 있을 뿐, 유족으로서는 망인의 처벌불원의사를 추단할 수 없고 자신의 고통과 상실에 대해서만 용서가 가능한 것은 아닐까. 결국 유족과의 합의를 진정한 감경인자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범행동기나 정황, 피고인의 진실된 참회 여부 등을 종합하여 피해자도 처벌을 불원하였을 것인지를 추단하여야 할 것 같다.

성폭력범죄에서 피해자가 피고인측의 집요한 연락과 요구로 생활의 평온이 깨어지고 추가적 피해가 두려워 합의를 하였다면, 이는 양형의 감경인자로 평가되어서는 아니 된다. 합의의 경위와 진정한 의미를 살펴보지 않는다면, 법원이 2차 피해를 조장하는 우를 범하게 될 수 있다. 또한 피해자가 합의하지 않거나 합의가 불가능할 정도로 고통이 지속될 경우에만 엄벌에 처한다는 것은 피해자에게 또 다른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오늘날 형사사법제도가 사적 제재를 금지하고 국가형벌권을 확립한 취지는 단순히 국가가 피해자의 뜻에 따라 복수를 대행해주겠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 형벌은 국민의 안전보장이라는 과제를 수행하고 법질서에 대한 복종을 관철하기 위한 수단으로 기능하므로, 국가는 범죄가 그 최초의 색으로 법질서를 교란한 순간을 놓쳐서는 아니될 것이다.

피해자가 용서했으므로 엄벌의 필요성은 소멸했다고 할 것인가. 용서는 피해자의 것이지, 국가의 것이 아니다. 피해자의 용서는 양형의 참작사유가 될 뿐 절대적인 기준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고 생각한다. 피해자는 용서하고 잊는다 해도, 아니 고통을 피하고자 가슴 속에 묻어버린다 해도 국가는, 그리고 개별 사건의 심판권을 위임받은 법관은 용서할 권한과 자격이 없으며, 잊어서도 안 될 것이다.


이숙연 고법판사 (서울고등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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