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法臺에서

도로무익(徒勞無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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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 힘주다 보면

문틀에 머리 부딪혀 혹이 생긴다
우리는 아픈 생각만 하지
혹 생긴 연유를 모르고
인생을 깨닫지 못한다

낮추어도 낮추어도
우리는 죄가 많다
뽐내어본들 도로무익(徒勞無益)
시간이 너무 아깝구나

- 박경리 ‘우리들의 시간’ -


법원의 11월은 언제나 분주하다. 결론이 쉽게 나지 않는 장기미제도 올해 안에는 어느 정도 정리해야 하고, 상반기 내내 치열하게 다투던 까다로운 사건들도 하반기에는 결론지어야 하는 판사의 마음은 누구보다 분주할 수밖에 없다. 비단 사건처리뿐만 아니라 통상 1~2년 단위로 사무분담이 변경되고 인사이동을 하게 되는 판사에게 있어서, 11월은 지난 한해를 되돌아보고 새로운 시작을 준비해야하는 유독 생각이 많아지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1년 열두 달 중에서도 11월은 지난 1년 동안의 내 모든 성과와 과오를 압축하여 한 번에 마주해야 하는 시기인지라 내내 껄끄럽고 불안하고 아쉽다. 매년 11월마다 더 나은 내년을 다짐해 보지만 올해도 결국 소망했던 더 나은 내년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최선을 다하지 못한 다시 오지 않을 지난 시간에 대한 아쉬움과 작년보다 한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한 스스로의 게으름과 부족함에 후회만 가득하다.

얼마 전 국가기관 신뢰도 조사에서 법원의 신뢰도가 5.9%로 전체 조사 대상 기관 중 5위를 자치했다는 언론 보도가 있었다. 최근 사법부를 둘러싼 일련의 사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국민으로부터 이 정도의 신뢰를 받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면서도, 예년보다 추락한 신뢰도에 사법부가 처한 엄중한 현실을 마주한 듯하여 부끄러움과 씁쓸함을 감출 수 없다.

어느 모로 보나 올해 11월은 참으로 뼈아프다. 그런데 그 뼈아픈 혹만 생각하고 그 혹이 생긴 연유를 놓쳐버린다면 우리는 인생을 깨달을 수도,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다. 낮추고 낮추어야 할 우리가 목에 힘주다 문틀에 부딪혀 생긴 혹일진대 여전히 뽐내어본들 도로무익(徒勞無益).


이은혜 판사 (서울동부지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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