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창 시절 제법 열심히 배워둔 것들이 변호사 일을 하며 한 번씩 요긴하게 쓰일 때가 있는데, 나의 경우엔 ‘일본어’가 그렇다. 지난 10월 19일 서울지방변호사회관에서 열린 <제9회 동아시아 금융피해자 교류회 만찬회> 의 메인 통역을 맡은 것도, ‘일본어를 하는 변호사’라는 희소성(?)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1. 동아시아 금융피해자 교류회
2010년 일본에서 처음 시작된 본 교류회는 매년 화제 되는 금융피해, 가계부채 문제 및 그 해결 방안, 법제 등을 연구하고 토론하는 자리로, 일본에서 대만으로, 그리고 한국으로 전파되어 매년 세 나라를 순회하며 열리고 있다.
법률가, 교수, 업계 종사자는 물론이고 불법 사채, 카드빚 등 비슷한 문제를 겪어온 피해자 참가자들까지 각자 준비한 발표 및 질의응답을 주고받기에 더욱 의미가 있다. 올해는 △각국의 채무조정제도 동향 △부실채권시장 동향 및 개선 방향 △청년 문제와 가계부채 해결 방안 등을 주제로 국경을 넘나드는 토론의 장을 펼쳤다.
일본 측 대표로는 창립 멤버격인 우츠노미야 켄지(宇都宮健·전 일본변호사연합회장) 변호사와 기무라 타츠야(木村達也) 변호사가 초대되었는데, 통역을 하느라 그 두 사람의 가운데에 자리하여 식사를 어떻게 마쳤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로 치면 ‘左(양)창수·右(김)영란’ 급 부담되는 자리랄까, 물론 그 덕에 과거 ‘대부업의 천국’ 일본이 어떻게 30년의 투쟁 끝에 ‘3대악(惡)’을 깨끗이 소탕한 것인지, 이를 이루어 낸 두 변호사에게서 직접 전해 들을 수 있었다.
2. 대부업 3대악(三大惡) 뿌리 뽑기
‘대부업 3대악’이란 과거 일본 대부업자들의 악질적인 ‘고금리·불법 채권추심·과잉대출’ 문제로, 1970년대 후반까지만 하여도 일본 정부는 이자를 무려 최대 연 109.5%까지도 허용하여 저소득층 서민들의 ‘돌려막기’가 성행하였고, 이로 인한 자살 및 가정불화, 야반도주 등은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IMF 외환위기 이후 이자제한법을 폐지하던 무렵인 1990년대 말, 일본은 반대로 점차 이자제한법 및 대부업 규제를 강화하기 시작하여, 당시 70%대였던 대출 금리를 60, 50, 40%대까지 단계적으로 낮추어갔다.
그 배경에는 이른바 ‘채무자 운동’이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 금융피해자를 위한 정통 파산 회생 전문 우츠노미야 변호사, 사금융 피해 구제와 고금리 인하 운동가 기무라 변호사, 그리고 그들을 필두로 금융피해자 및 시민단체, 법률가들이 모여 대출이자 낮추기 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그 결과, 2006년 개정 이자제한법은 대출 금리를 최대 연 20%까지로 제한하며 규제를 대폭 강화하였다(현행 동일). 심지어 이는 대출 금액에 따라 다른데, 10만~100만 엔은 연 18%, 100만엔 이상은 연 15%까지 제한하기도 한다. 물론 이 모든 규제의 목적은 ‘서민 채무자 보호’에 있다.
아울러 일본 정부는 대부업법을 개정(2009년)하여 △자본금 5천만엔 이상(제6조 제1항, 제3항), △일정 자격시험을 통과할 것(제24조 이하)을 대부업 등록 요건으로 정하였고, △법규 위반 시 벌칙(제47조~제52조)을 강화(무등록 대부업체는 10년 이하의 징역, 3천만엔 이하의 벌금)하였다(현행 동일). 그리하여 1999년 30,290곳이었던 대부업체 수는 2018년 3월 현재 약 1,770곳(일본 금융청 통계)으로 약 20년 만에 5.8% 수준으로 대폭 줄었다. 우리 나라의 등록대부업체는 2018년 현재 약 9,649개(금융감독원 통계)로 한·일 양국의 차이는 매년 벌어지고 있다.
일본 정부가 규제를 강화하자 일본계 대부업체는 앞다투어 한반도로 건너왔다. 앞서 이야기했듯 당시 IMF 금융위기 직후 이자제한법이 폐지된 대한민국은 일본의 대규모 사채업자들에게 ‘기회의 땅’이었다. 1999년 일본계 대부업체 러시앤캐시(現 아프로 서비스)를 시작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산와머니(산와대부), 오릭스, 제이트러스트, SBI저축은행 등이 들어왔는데, 현재까지도 업계 대부분은 일본계 기업이 장악하고 있다.
일본 정부가 대부업 3대악을 소탕한 지난 30년 동안, 갈 곳을 잃은 악덕 대부업자들은 대한민국에 정착하여 새로운 서민 금융 피해자를 양산하고, 금융 건전성을 흐린 셈이다.
3. 끝나지 않은 숙제, 빈곤과 복지
일본 소설 <화차>는 90년대 버블 경제 붕괴 당시 일본의 모습을 실제와 가깝게 그렸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국내에서는 IMF 당시 한국을 배경으로 각색, 영화로 개봉(2012년)되었다. 결혼을 앞둔 한 여성이 카드빚과 사채에 쫓기다 파산한 뒤 다른 사람의 신분을 훔쳐 살아가야 했던 이야기로, 극중 우츠노미야 변호사를 모델로 한 인물이 등장하여 사실성을 더하였다.
실제로도 영화 같은 인생을 살아온 그는 30년간 채무자들을 위하여 사투하였고, 2007년부터는 ‘반(反)빈곤 네트워크’의 대표를 맡았으며, 동시에 ‘반(反)혐한(嫌韓)’ 활동가이자 인권운동가로도 이름을 알리며 법률가로서의 사회적 역할과 책임을 다하고 있다.
우츠노미야 변호사는 이날 자신의 발표 순서에서 “최근 일본에서는 은행·카드론 채무 피해 문제가 이슈”라며, “일본은 대부업 3대악 근절 정책으로 2009년부터 소득의 3분의 1까지로 대출 액수를 제한하였는데, 이는 ‘대부업’에만 적용하고 은행 기타 금융기관에는 적용이 없어 은행·카드론 과잉융자 문제가 새로이 떠오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GDP 5조억 달러(2018 IMF 기준)의 세계 3위 경제 대국 일본의 한 변호사가 자국의 ‘빈곤’ 문제를 지적하며, 정부가 나서서 ‘복지’로 이를 해결하지 아니하면 또다시 다른 한계에 봉착하고 말 것이라고 한다. 일본 변호사연합회에서도 관련하여 의견서를 낼 정도로 법조계에서도 우려하고 있단다. 그에게는 아직도 자국 사회는 해결해 나갈 숙제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것이다.
한국, 일본, 대만 3국의 서민들은 불법 사채, 카드빚 등의 금융피해 문제로 고통받고 있다는 점에서 묘하게 닮아있다. 그리하여 서로 간의 정보 교류 및 원조 목적에서 시작한 것이 ‘동아시아 금융피해자 교류회’ 이다. 사실 일본의 경우에는 일찍부터 ‘채무자 운동’의 움직임이 있었기에 법정 최고금리를 인하하고 불법 대부업을 시장에서 퇴출하여 ‘대부업 3대악’의 뿌리를 뽑아내었으니, 물론 그 덕에 한반도가 일본계 대부업자들의 먹잇감이 된 측면도 어느 정도 있겠지만, 그들의 선례를 충분히 답습하고 연구하여 효율적 서민금융지원 및 대부업 규제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요구된다.
직접 <동아시아 금융피해자 교류회> 현장을 찾아보니, 이 땅에서 불법 사채업을 몰아내고, 그로 인한 선량한 피해자 양산을 막기까지 30년이 걸릴 이유가 있을까 싶다. 참가자들은 일본의 ‘대부업 3대악 뿌리 뽑기 30년 역사’를 통하여 국가에 의한 법제 정비의 필요성을 실감하였고, 각자의 위치에서 나름의 역할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피해자들 스스로도 자력 구제 및 회생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기 때문이다.
최유진 변호사 (법무법인 이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