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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포럼

씻을 수 없는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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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사고를 담는 그릇이라 했던가. 언어는 사고를 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를 형성하고 규정하며 고착시키기도 하는 것 같다. 판결문에 관용구처럼 쓰여지는 표현들은 해당 사안에 대한 법관과 사건당사자들, 더 나아가 국민들의 사고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으므로 세심한 검토가 필요하다. 


성희롱, 성폭력 사건 판결문에서 유독 부적절한 표현이 발견된다. 대표적인 것이 “피해자는 이 범행으로 평생 씻을 수 없는(또는 지울 수 없는) 충격과 고통을 받았다”는 것이다. “씻을 수 없다”, “지울 수 없다”는 것은 대개 ‘오점’, ‘과오’, ‘불결함’과 함께 사용된다. 여기에는 성범죄로 인하여 피해자가 아무리 씻어도 씻을 수 없이 더럽혀졌다는 과거의 정조관념이 뿌리깊게 박혀있는 것 같다. 성범죄 피고인이 중형에 처해져야 하는 이유는 그가 피해자를 자신과 동등한 존엄한 인간으로 대하며 그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존중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이나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 마치 생명이나 영혼이 없는 존재인 것처럼 대했다는 것에 있지, 피해자가 평생 씻을 수 없는 고통을 받기 때문은 아니어야 한다.

트라우마를 쉽게 극복하기 어렵더라도 그것은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 한’ 또는 ‘상당한 기간 동안’, ‘치유하기 어려운’ 또는 ‘잊기 어려운’ 고통이나 상처이지, 평생 씻을 수 없는 오점은 아니다.

참혹한 피해를 딛고 가해자를 법정에 세워 정의를 실현하거나, 사회에 경종을 울리며 불굴의 인간정신을 보여준 피해자들을 우리는 보아왔다. 진실을 세상에 알린 위안부 할머니들, IS의 성노예 피해를 딛고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여성운동가 나디아 무라드와, 미투 운동과 성폭력 피해의 용감한 증인들에게, 누가 감히 ‘평생’, ‘씻을 수 없다’는 표현을 쓸 수 있는가.

적어도 피해자들의 고통이 ‘평생’ 가지 않도록 적시에 정의를 세워야 할 책무가 있는 법조인들은 이런 표현을 써서는 아니될 것이다. 또한 국가와 사회는 이들의 고통을 치유하고 회복할 사회적 프로그램과 문화를 가꿔갈 책임이 있다.

또 하나의 표현은 ‘성적 수치심’이다. 우리 대법원 판결은 성희롱의 요건으로 ‘성적 굴욕감’ 또는 ‘혐오감’을 들고 있을 뿐이다. ‘수치’란 ‘다른 사람들을 볼 낯이 없거나 스스로 떳떳하지 못함. 또는 그런 일’을 뜻하고, ‘수치심’은 그와 같은 감정을 말할진대, 성희롱 피해자가 왜 스스로 떳떳하지 못한 감정을 느껴야 하는지 알기 어렵다. 아동복지법상 아동에 대한 성적 학대행위 등 ‘성적 수치심’을 요건으로 하는 규정이 아직도 개별 법률 곳곳에 산재한다. 왜 피해자가 수치스러워야 하는지, 수치심은 가해자가 진정으로 자신의 행동을 뉘우칠 때 느껴야 할 감정이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언어는 법률가의 도구이므로 이를 잘 갈고 다듬으며, 시대변화에 따라 기존의 표현도 재점검하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 같다. 법관들이 판결문에 관용어처럼 사용하는 표현이 피해자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수치심’의 낙인을 찍는 것은 아닌지, 이제 이러한 표현의 사용은 지양할 것을 감히 제안드린다.


이숙연 고법판사 (서울고등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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