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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포럼

Fast and Furio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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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형사재판에 대한 비판 중 하나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는 것이다. 이곳 재판소 역시 설립 준비 당시 3년 정도면 마무리될 것이라는 예상도 있었으나 현재까지 12년 동안 피고인 3명에 대한 재판을 마쳤을 뿐이고, 피고인 2명은 재판 도중 사망하였다. 


부임 초기 빙하의 속도(glacial pace)로 움직이는 이곳의 업무에 적응하기 쉽지 않았다. 특히 직전까지 우리나라 법원에서 많은 사건을 신속히 처리해야 한다는 부담 아래 근무하다가 정반대의 환경에 처하게 되니, 마치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 같았고 죄책감마저 느껴졌다. 어느덧 이제는 근무시간이 오전 8시부터 오후 4시 반까지임에도 오후 6시까지 초과 근무한 직원을 격려하는 일이나, 긴급 업무를 담당한 동료가 인터넷이 없는 곳으로 한 달간 휴가를 가서 전혀 연락이 되지 않는 일들이 평범한 일상으로 느껴지고 있다.

부당한 지체 없이, 상당한 기간 내에(without undue delay, within a reasonable time) 재판을 받을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국제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고, 이러한 권리의 침해 여부가 쟁점이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필자가 속한 재판부는 최근 1심이 심리종결 후 1년 6개월 만에 결정을 내린 것은 사안의 복잡도나 피해자 보호 등을 고려할 때 부당하게 절차를 지연한 것이라는 취지의 판단을 하였다. 그러자 1심 판사는 그 후 다른 사건의 결정 이유에서, 위 판단은 1심이 처해 있는 현실적 제약을 비롯한 구체적 사정에 대하여 고려하지 않았다는 취지로 반박하였다.

이와 같이 재판의 지연을 다투는 사건에서 업무 과중이나 인적, 물적 자원의 부족과 같은 현실적 제약은 정당한 사유로 인정되지 아니하는 것이 보통이다. 사법부를 포함하여 국가는 국민의 권리가 충분히 보장되는 체제를 마련해서 운영하여야 할 당연한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당위와 현실은 좀처럼 일치하지 않는다.

현실적으로 단기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사법부에 국가 자원이 우선 투입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대법원 판사 한 사람이 1년에 2천여건을 처리하고 있음에도 재판이 30년씩 걸리는 등 사상 최악의 재판 지연 사태로 많은 사회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인도(India)에서는, 대법원장이 전체 판사 수를 두 배 이상 늘리지 않고서는 문제 해결이 불가능하다고 공개적으로 호소하면서 눈물을 보이기도 하였다.

우리나라 법원은 그간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사건에 한정된 자원으로 대처하여 오는 과정에서 충실한 심리라는 가치를 희생하고 있다는 내외부의 지적을 받아 왔고, 마침내 사법부 구성원들의 헌신이나 효율성 중심의 사법행정 등 ‘운용의 묘’(modus operandi)를 살리는 방법만으로는 해결하기 불가능한 지점에 이르게 되었다고 보인다.

영장 재판에서 이미 유무죄까지 재단되어 버리곤 하는 속전속결 지향의 사회에서, 대법원과 헌법재판소를 포괄하는 사법부가 몇 번에 걸쳐 얼마나 충실하게 재판을 하여야 하고, 그 재판담당자는 누가 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투입할 자원의 양은 어느 정도인지 등과 같은 전체적 시각의 접근은 본격적으로 시도되고 있지 않은 듯하다. 당장 드러난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고 개별 내부 시스템을 개선하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사법부의 미래 생존(modus vivendi)이 달린 주제를 제대로 된 공론장(Offentlichkeit)에 올릴 시점이다.

백강진 재판관(크메르루즈 특별재판소)
미국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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