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서초포럼

삼 세 번의 미로

146617.jpg

#사례 1. 정리해고를 당한 근로자 A는 회사를 상대로 해고무효확인소송을 제기하였다. 유능한 변호사를 선임한 회사와 1년 넘는 법정다툼 끝에 승소하였으나, 회사는 항소하였고 항소가 기각되자 상고하였다. 업무감각을 유지하고자 잠시 유사 업체에서 일하고도 싶었지만 소송에 불리하게 작용할까봐 포기하였다. 호구지책으로 임시직을 전전하며 3~4년을 보내다 보니 승소판결이 확정되어 복직하더라도 적응할 수 있을지 두렵기만 하다. 한창 일할 나이에 허송한 세월은 그간의 임금 수령만으로는 돌이킬 수 없을 것 같다. 


패소가 불가피함을 알지만, 상소비용을 지출하더라도 패소판결의 확정을 지연시키는 것이 더 이득인 당사자도 있을 것이다. 자력마저 풍부하다면 3심제를 최대한 활용하려 할 것이나, 하급심에서 승소하고도 거듭 상소에 응해야 하는 상대방에게는 가혹한 고통일 것이다. 두 번의 재판에서 충분하게 주장, 입증하였다면 거기서 멈출 수 있는 길을 열어주어야 하지 않을까.

#사례 2. 영세 하수급업체인 B는, 하도급업체인 C가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하도급법 위반행위로 시정명령 등 처분을 받자, C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하였다. 그런데 C가 시정명령 등 처분의 취소를 구한 행정소송에서 승소 확정판결을 받아, 하도급법 위반행위는 인정하기 어렵게 되었다. C의 행위 이면에는 해당 업계의 불황과 대기업-중소기업-하청업체로 이어지는 갑을 관계의 연쇄 등 C에게 책임을 묻기 어려운 여러 사정이 얽혀 있었다. B는 민사소송 1심에서 패소한 후 항소하였다.

하도급관계에서 큰 적자를 본 B를 구제할 방안이 없는지 기록과 판례를 샅샅이 찾아보고 재판부가 머리를 맞대고 법리 검토를 거듭하였다. 그러나 행정소송 결과 하도급법 위반책임을 묻기 어려웠고 달리 책임을 물을 길이 보이지 않았다. 어렵게 법리를 구성하더라도 상고심까지 유지되리라 기대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사정을 설명하며 ‘지금까지 잘 싸워오셨습니다만, 여기까지인 것 같습니다. 이제 분쟁을 마무리 짓고 생업으로 돌아가실 때가 된 것 같습니다’라는 뜻을 간곡하게 전하였다. 다행히 사건은 원만히 종결되었다. 판결이 선고되고 패소한 당사자가 상고하였다면 양 당사자 모두 그 만큼의 시간과 에너지를 허비하였을 것이다.

20여 년간 수많은 재판 당사자를 만나면서, 삼 세 번의 재판이 누군가에게는 권리구제를 지연시키고, 누군가에게는 이유 없는 청구에 거듭 응소해야 하는 고통을 주며, 또 누군가에게는 실낱같은 기대 속에 희망고문을 이어가는 것은 아닌지, 불변의 진리처럼 여겨지는 3심제가 진정으로 국민을 위하는 것인지 생각하게 된다. 앞으로 법관들은 각기 해당 심급 재판의 충실화를 위하여, 또한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하여 뼈를 깎는 노력을 기울이게 될 것이다. 하급심의 충실화 노력과 더불어, 신속한 권리구제와 분쟁해소를 위하여 상고허가이건 다른 무엇이건 ‘여기까지입니다’라고 말해 줄 제도나 역할을 고민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이따금 당사자들의 얼굴과 절절한 사연이 떠오를 때마다 부디 분쟁의 미로에서 벗어나 평온을 찾으셨기를 기원한다.

이숙연 고법판사 (서울고등법원)
리걸에듀

관련 법조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