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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포럼

Indecent Proposal

145905.jpg캄보디아 사법연수원의 의뢰에 따라 이곳 사법연수생들에게 판결서 작성에 관한 강의를 할 기회가 있었다. 공동 강사로 함께 초빙된 미국 판사는 영미법계 국가의 실무를, 필자는 대륙법계 국가의 실무를 각각 설명한 후 수강생들과 종합 토론을 하였고, 토론 결과 본질적으로 판결서에 명시할 사항은 세계 어디에서나 같다는 점에 공감할 수 있었다. 

 

다만 필자는 법관의 자유심증주의를 폭 넓게 채택하고 있는 대륙법계 국가일수록 판결 이유를 더욱 자세히 밝혀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캄보디아 법이 뿌리를 두고 있는 프랑스는 형사소송에서 법관으로 하여금 ‘내적’ 확신(Intime Conviction)에 따라 증거를 판단하도록 하고 있다. 비슷한 영어 단어 ‘Intimate’가 ‘사적인 친밀함’이라는 의미까지 갖고 있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법관이 결론을 내는 과정에 대하여 최대한의 비밀과 자유를 보장함으로써 과거 법정증거주의의 폐해를 극복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외적 통제를 받지 않는 법관은 개인적 신념뿐 아니라 앵커링 효과(Anchoring Effect)나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과 같은 무의식적 편견에도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불리한 판결을 받은 당사자는 외부에 드러난 단편적 사실만을 기초로 법관의 내적 사고 과정에 대한 의혹을 갖기도 한다. 유럽인권재판소 판례 중에는 판사가 변론 당시 눈을 감고 있었다는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었더라도 그가 잠들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판시한 사안(Senn v. Switzerland)까지 있다. 이러한 법제 아래에서 법관은 자신의 판단 과정을 더 자세히 설명하여야 한다.

 

필자가 과거 우리나라에서 쓰던 판결과 이곳 재판소에서 쓰고 있는 판결과의 차이 중 하나는 거의 모든 문장에 상세한 각주가 달린다는 점이다. 판결서 초고를 검토하면서 각주에서 인용한 선례나 문헌, 증거들의 원문 및 판결 본문과의 관련성을 다시 확인하는 작업(Cite Checking)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인다. 이를 통해 판결의 객관성을 높일 수 있고, 나아가 각주가 없는 부분은 구체적 사안에 대한 재판부 고유의 내적 고민과 논증의 결과임을 명확히 알 수 있게 되기도 한다. 

 

미 연방 대법관 올리버 웬델 홈즈의 "법은 어떠한 결론에도 논리적 형태를 부여할 수 있다" 는 주장은 법제에 관계 없이 음미할 가치가 있다. 원하는 결론에 이르기 위해 일반적, 종합적인 전제에서 상세한 논증 없이 결론으로 비약하거나 ‘신의성실의 원칙’, ‘사회 통념’ 등과 같은 불확정 개념에 전적으로 기대고 싶은 유혹은 인간이 가지는 심리 경향의 하나일 것이나, 직업 법관은 이를 극복해야만 한다.

 

특히 법관이 법 해석이나 이익형량을 통하여 대립하는 보호 가치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거나 미래에 대한 정책적 판단을 할 경우에는 순수한 논리적 정합성 뿐만 아니라 그것이 특정 시기를 지배하거나 일부 세력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담론을 추종한 것이 아니라는 근거를 이유에서 밝힐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만일 판결이 그 기재된 이유와는 무관하게 부당한 외부의 영향력 아래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의심을 받기에 이른다면, 이는 그 법체계의 존재 이유를 되묻게 하는 중대 사안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 법원이 목표로 삼고 있는 ‘좋은’ 판결에는, 적어도 결론이 도출된 과정에 대해 의문을 가질 여지가 없을 정도로 충분한 이유가 제시되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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