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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생활

[나의 문화생활] 뮤지컬 ‘웃는 남자’를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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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는 입모양으로 입을 찢은 흉측한 얼굴이라고 하면 아마도 대부분 ‘다크나이트’에서 히스 레저가 분한 악당 조커를 떠올릴 것이다. 그 무서운 웃는 얼굴, 조커의 모티브가 된 인물이 바로 빅토르 위고의 소설 ‘웃는 남자’의 주인공 그윈플렌이다. 괴물공연이 인기를 끌던 17세기 영국, 귀족들 사이에서 괴상한 모습의 어린 아이를 소유하는 것이 유행을 하자 어린이들을 납치해 기형으로 만들어 귀족들에게 팔던 잔인한 사람들(콤프라치코스)이 있었다. 그윈플렌은 어릴 때 이들에게 납치되고 입을 찢겨 웃지 않아도 항상 웃는 얼굴로 살아가야하는 광대이다. 이 웃는 얼굴의 괴물 광대가 폭염에 지친 한국의 뮤지컬 팬들에게 기괴하고 서늘하고 흉측한 매력을 선사하러 왔다. 뮤지컬 ‘웃는 남자’는 올해 뮤지컬 공연 중에서 제일 기대되는 작품으로 손꼽혀 온 작품이었기 때문에 나도 몇 달 전부터 예매를 해 두고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데…’라고 애써 덤덤한 척하며 기다려 왔다. 빅토르 위고의 다른 소설들로 만들어진 뮤지컬‘노트르담 드 파리’, ‘레미제라블’이 이미 명작의 반열에 올라 있는데다 빅토르 위고가 자기 소설들 중에서 ‘웃는 남자’가 최고라고 했다고 하니 일단 스토리의 품격은 확보했고, 로버트 요한슨 연출에 프랭크 와일드혼 작곡이면 사실 올인을 할 패이긴 했다. 

 

빅토르위고의 소설 극화

 

그윈플렌·데아 듀엣 '환상적'


드디어 디데이. 막이 오르고, 예상했던 것처럼 나는 프랭크와일드혼 특유의 서정적인 넘버들에 매혹되었다. 그윈플렌과 그의 연인 데아의 아름다운 듀엣곡 ‘나무 위의 천사’, 그윈플렌이 여공작 조시아나의 적극적인 구애를 받고 흔들리면서 “나도 행복할 기회가 있을까?”하고 부르는 ‘Can it be?’, 귀족들 앞에서 “눈을 떠. 가진 것을 나눠 봐. 모두가 사람답게 살 수 있을 때까지.”라고 연설을 하는 ‘그 눈을 떠’까지 모두 환상적이다. 


노래와 연기와 의상 모두 훌륭했지만 의외로 생각지도 않았던 무대예술에서 큰 감명을 받았다. 화려하고, 스케일이 남다르고, 감각적이고, 상징적이면서도 기술적으로도 완벽한, 좀 더 쉬운 말로 묘사하자면 제작비가 아낌없이 투입되었음이 확실하게 느껴지는 무대였다. 1막이 시작하자마자 나오는 첫 장면에서 그윈플렌을 버리고 간 콤프라치코스의 배가 폭풍에 침몰할 때 무대 가득 파도가 넘실댔다. 처음부터 무대의 스케일에 압도되었다. 유랑극단의 사람들이 강물에서 빨래를 하는 장면에서는 정말 배우들이 물을 튀기고 첨벙거려 정말 물이지? 하며 눈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무대가 기술적으로만 완벽한 것이 아니었다. 그윈플렌이 혼자 가시밭을 헤매는 장면에서는 가시밭길이 둥글게 겹겹이 쳐져 있어 가혹한 현실이 더욱 따갑게 가슴에 와 닿았다. 조시아나가 그윈플렌을 유혹하는 천막과 출생의 비밀이 밝혀진 후 그윈플렌이 자고 일어난 침실은 몇 십 미터는 족히 될 듯한 길이의 커튼으로 화려함을 자랑하고, 여왕이 주재하는 상원회의에서 귀족들이 앉은 둥근 의석들도 꽤 감각적이고 인상적이었다. 이런 무대예술이 가능한 것이 대형뮤지컬의 맛이라고나 할까. 


파도·폭풍우 등을 실감나게 구현한

무대예술도 감동적

 

 

다만‘부자들의 낙원은 가난한 자들의 지옥으로 세워진다’는 카피를 여러 번 반복하면서 사회구조적인 문제에 날을 세운 것 치고는 결말이 다소 개인적이고 그저 낭만적이거나 감상적이지 않은가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윈플렌은 상원에서 빈곤층을 구제하기 위해 연설을 하지만 귀족들의 비웃음만 사고 아무런 소득을 얻지 못하자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연인과 가족에게로 돌아가려 한다. 이 과정이 그윈플렌의 넘버 두 개로만 설명이 되다보니 이야기에 개연성이 떨어져 보이는 느낌이 들었다. 어린이를 기형으로 만들어 장난감 삼는 귀족 부류와 인신매매단들의 존재를 고발하고 부자들이 귀족들이 가난한 자들을 어떻게 착취하는지를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문제의 제기는 충분했다 할 수도 있겠지만 빅토르 위고 원작의 다른 뮤지컬 ‘레미제라블’에서 군중들이 ‘One day more!’, ‘Do you hear the people sing?’을 부르던 모습에서 받은 그 벅차오르는 감동과 비교를 하게 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하긴, 완벽한 작품에서 이런 티끌을 찾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미 다른 것이 충분한데. 

 

 

이윤정 교수(강원대 로스쿨) 

리걸에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