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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청년시대

같은 일을 세 번 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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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스포츠에는 종주국 논란이 있기 마련이지만, E-스포츠, 특히 스타크래프트에 대해서만은 논란이 없다.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을 스포츠로 만든 나라도, 세계 최고의 프로 게임리그를 운영하는 나라도 모두 대한민국이다. 물론 가장 잘 하는 것도. 탁구대에 구형 배불뚝이 모니터를 올려놓고 스타크래프트 대회를 중계했던 99년부터 광안리 백사장에 10만 관중을 동원했던 EVER 프로리그까지, 이제 ‘아재’가 된 90년대 대한민국의 소년들이야말로 세계 E-스포츠의 역사를 함께한 증인들이다.

이 찬란한 '스타'의 역사, 정확히는 테란, 프로토스, 저그 3종족의 역사에서 유독 저그 팬들의 가슴에 상처로 남은 흑역사가 있다. 이른바 '3연벙' 또는 '같은 걸 세번 당하기'로 지금까지 회자되는 임요환(테란) 대 홍진호(저그)의 경기다.  

때는 2004년 11월 12일. 홍진호는 영원한 라이벌 임요환과 4강에서 맞붙었다. 이른바 '임진록'. 수없이 저그를 꺾고 우승을 차지했던 '테란의 황제' 임요환과, 단 한 차례도 결승전에서 이기지 못했던 만년 준우승자 '폭풍저그' 홍진호가 결승 진출을 놓고 격돌하는 자리였다. 

사람들의 관심은 뜨거웠다. 젊은이들은 이 역사적인 매치업을 생방송으로 지켜보기 위해 하교를, 퇴근을 서둘렀다. 월드컵 경기를 방불케 하는 관심 속에 수많은 호프집이 대형 모니터로 이 경기를 생중계했다. 

그리고, 비극이 일어났다. 당시 저그들은 공격 유닛을 생산할 수 있는 스포닝 풀보다 자원을 확보하는 해처리를 먼저 건설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테란의 황제는 이 점을 놓치지 않았다. 저그가 아직 공격 유닛이 없는 극초반을 노려, 다수의 SCV를 끌고 나가 저그의 해처리 앞에 공격용 벙커를 지어버렸다. 이른바 '벙커링'. 저그의 드론은 테란의 SCV보다 체력과 공격력이 약했고, 아직 공격유닛이 없는 저그가 드론만으로 이 벙커링을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당시의 정설이었다. 이런 벙커링에 대한 우려는 경기 전부터 조금씩 나오고 있었지만, 저그 팬들은 막연히 '홍진호라면 어떻게든 해줄 것'이라는 믿음으로 애써 불안감을 억눌렀다. 경기 시작 후 단 5분만에, 그 불안은 참혹한 현실이 되었다.
 
3연속 벙커링. 테란의 황제는 5전 3선승제의 1, 2, 3세트에서 모두 벙커링을 사용했고, 저그는 단 한 차례도 막지 못했다. 경기당 10분을 넘지 않는 극단적인 단명국. 저그는 똑같은 걸 세번 당했다는 조롱 속에 4강에서 탈락했다. 이 경기 이후, 홍진호는 다시는 결승에 진출하지 못했다.  

이후 방영된 온게임넷의 특집 프로그램에서, 결승 무대 뒤편의 홍진호가 '꼭, 우승하고 싶죠' 라는 말과 함께 멋적게 돌아서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힌다. 지금이야 '2등의 아이콘'으로 유명해진 방송인이니 홍진호에게 그날의 패배는 전화위복이었던 것일까. 그러나 이제 '아재'가 된 30대의 팬들에게, 2004년의 홍진호는 여전히 마음 한켠의 아픈 손가락이다. 

그로부터 14년이 지난 2018년, 서울 강남역에서 또다른 '스타 리그'가 열렸다. 바로 올해로 2회째를 맞은 서울지방변호사회장배 E-스포츠 대회. 100여 명의 변호사들이 참가하여, 열띤 경쟁을 펼쳤다. 그리고 2018년 7월 7일 토요일, 결승에는 단 두 명의 변호사만이 남았다. 저그 최경환, 프로토스 이윤우. 

이 두 변호사들의 실력은 '탈 일반인급'이었다. 최경환 변호사는 작년 1회 대회의 우승자. 그에 도전하는 이윤우 변호사는 첫 출전임에도 대회 전부터 우승후보로 점쳐진 고수였다. 역대 참가자 중 가장 빠른 APM(이윤우 변호사의 APM은 300에 육박한다)을 보여주며 전승으로 결승에 진출한 프로토스 이윤우 변호사에게 관중들의 시선이 쏠렸다. 1세트에서 장기전 끝에 프로토스가 승리를 거두자(경기력의 차이가 심하고 멘탈 관리가 어려운 아마추어들의 대결은 첫 세트의 승패가 바로 전체 승패로 직결되는 경우가 많다), 이 경기를 트위치로 지켜보던(이 대회의 결승전은 박대영 변호사에 의하여 트위치 TV로 생중계되었다) 저그 팬들은 또다시 불안한 예감에 휩싸였다.
 
그러나 저그는 더이상 '같은 식으로 세 번' 당하지 않았다. 1세트에서 수비적인 플레이를 펼치다 패했던 최경환 변호사는, 이어지는 2, 3세트에서는 모두 최소한의 드론만을 생산한 후 모든 해처리에서 오직 히드라리스크만을 생산하여 몰아붙이는 총공세로 전환했다. 1개의 게이트웨이만을 건설하고, 커세어와 다크템플러 등 소수 고급유닛으로 수비하려 했던 프로토스는 사납게 몰아치는 저그의 공격력을 감당하지 못했다. 마침내 세트 스코어는 2:1. 우승의 향방을 결정지을 4세트가 시작되었다. 

운명의 4세트. 해설자 박대영 변호사도, 이를 지켜보던 수많은 관중들도, 그리고 마우스를 쥔 두 선수들도 똑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과연, 세 번 연속으로 히드라를 쓸까.  

프로토스 이윤우 변호사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간 히드라 러시에 연패하긴 했으나 점차 적응하고 있었고, 3세트에서는 단 10초만 더 버텼어도 하이템플러의 사이오닉 스톰으로 막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저그의 공격을 늦출 수 있는 것은 클로킹(투명) 유닛인 다크템플러뿐이었고, 다크템플러가 활약하려면 클로킹을 간파할 수 있는 저그의 오버로드를 척살해야 했다. 지난 3세트로 오버로드의 공중 이동경로는 거의 파악된 상태. 막중한 임무를 띠고 프로토스의 공중 전투유닛, 커세어가 출발했다. 

그러나 저그 최경환 변호사는 '세 번 연속으로 치는 법'을 알고 있었다. 같은 방법이되, 같은 방식이 아니었다. 경기 초반, 저그의 오버로드 하나가 조용히 맵의 중앙으로 향했다. 일반적인 이동 경로에도, 정찰 경로에도 해당하지 않는 전혀 ‘생뚱맞은’ 위치. 그러나 그곳은 맵의 중앙이었고, 프로토스가 어디에 있든, 수학적으로 가장 가까운 위치이기도 했다. 프로토스의 커세어는 사방으로 맵을 휘저었지만, 맵의 한가운데에 유유히 떠 있던 이 오버로드를 끝내 찾아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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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그 최경환 변호사의 최종전 오버로드 위치. 가운데 떠 있는 노란색 점이 바로 승부를 결정지은 그 오버로드다) 

 

그리고 다시 한번, 승부를 결정짓는 히드라리스크 러시가 시작되었다. 프로토스는 뒤늦게 이 오버로드를 찾아내고 집중공격을 하려 했으나, 이미 도착한 히드라리스크들이 결사적으로 오버로드를 보호했다. 프로토스는 핵심 유닛인 다크템플러를 지키며 항전했으나, 오버로드를 동반한 히드라들에 의하여 다크템플러가 전사하면서, 결국 GG를 선언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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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가 되자, 프로토스의 본진으로 전진하기 시작한 오버로드. 프로토스는 뒤늦게 이를 발견하고 집중공격하였으나, 이미 히드라리스크 호위대가 도착하여 오버로드 척살에 실패하고 만다) 

 

이로써 제2회 서울지방변호사회장배 E-스포츠 대회, 스타크래프트 부문의 우승은 저그 최경환 변호사에게 돌아갔다. 이 우승은 어떻게 기억될까. '세 번 당한 저그가, 세 번 되갚아주었던' 우승으로 기억될까.

 

나는 이 우승이, '같은 일을 계속 해내는 방법' 으로 기억되길 바란다. 비록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프로토스 이윤우 변호사도 게임 내내 똑같은 원 게이트 플레이를, 매번 다르게 펼쳤다. 때로는 초반 질럿을 공격용으로 투입하여 저그를 몰아붙이고, 때로는 수비적으로 멀티를 빠르게 건설하여 후반을 도모했다. 단지 이에 맞서는 저그의 대응이 워낙 좋았던 것뿐이다. 경기 내면을 들여다보면 두 선수의 플레이는 4경기 내내 단 한번도 똑같았던 적이 없었다. 치열하게 서로를 탐구하고 분석하여, 다음 경기에 적용하는 싸움이었다.

 

변호사들의 싸움 역시 이와 같다. 아무리 간단하고 전형적인 소송이라도,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이다. 모든 사건에는 그 사건만의 특별함이 있다. 비슷한 사건에서의 경험을, 그 특별함에 더 잘 녹여낸 변호사가 더 좋은 판결을 받는다. 결승에 진출한 두 변호사의 서면이, 틀림없이 정교한 논리와 치밀한 사실관계로 채워져 있을 것이라 믿는 이유다.

 

사법연수원에서도 로스쿨에서도, 법조인들은 하늘 아래 똑같은 사건은 없다고 배운다. 항상 똑같은 법리를 매번 새로운 사건에 적용하여야 하는 법조인들에게, 이 경기는 많은 것을 시사한다.  

 

혹자는 화려한 전투를 펼친 질럿과 템플러, 그리고 승자가 된 히드라리스크만을 기억할지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강력한 유닛이라도,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울 수는 없다. 보이지 않는 다크템플러를 아군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오버로드는 경기 내내 비슷하지만 다른 경로, 멀고 비효율적인 경로를 꼼꼼하게, 그러나 우직하게 움직여나갔다.  

 

재판이 끝나면, 언론은 수십, 수백억의 금액과 당사자들의 엇갈린 표정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춘다. 그 긴 싸움의 뒤편에서 묵묵히 소송을 수행해온 변호사들은 어디에도 드러나지 않는다. 알려진 법리, 제시된 사실관계 너머에서 드러나지 않은 진실을 찾아내려 밤을 새웠던 그들의 치열한 고뇌도. 모든 판결문의 첫 장에, 반드시 소송대리인의 이름이 적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경기를 지켜본 수많은 변호사들에게 마지막 결승전의 오버로드는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까. 마침내 경기가 저그의 승리로 끝났을 때, 전장 위에는 여전히 상처투성이의 오버로드가 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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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준 변호사 (서울변회 E-스포츠 동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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