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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포럼

태양은 가득히(Plein Sole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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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재판소에서 근무하면서 맡게 된 사건 중 한국에서 자주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은 판결서 및 소송기록의 공개에 관한 재판이다. 이곳에서 판결서는 공개가 원칙이지만 예외적인 경우 이를 비밀(Confidential)로 분류할 수 있다. 다만 그 경우에도 적절한 편집(Redaction)을 거친 공개 (Public) 버전을 함께 만든다. 당사자들도 자신이 제출하는 소송서류의 공개 범위를 지정해야 하고 그에 대한 재판부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유엔의 시민권과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ICCPR) 제14조에 정한 바와 같이 판결의 원칙적 공개는 모든 종류의 재판에 적용되어야 하는 국제 기준이고, 우리 헌법 제109조 또한 이를 명시하고 있다.

필자가 속한 재판부는 최근 판결서 핵심 이유의 일부 비공개를 명한 1심 판결을 만장일치로 뒤집으면서 보호 증인들의 이름을 제외한 나머지를 공개하고, 관련 소송기록도 공개하라는 취지의 판결을 선고하였다. 1심은 사생활과 명예 보호의 필요성을 비공개의 주된 이유로 들었지만, 재판부는 사법절차의 투명성, 피해자 및 공공의 알권리 등에 기초한 판결 공개의 가치를 사생활 등 보호의 가치보다 우위에 두고, 무엇보다 판결의 결론에 이르게 된 핵심 이유를 공개하지 않는다면 사법 정의(Interest of Justice)에 어긋난다는 취지로 판시하였다.

이곳의 재판은 어떠한 결론을 내든 외부로부터 상당한 비판을 감내하여야 하고, 이러한 점에서 사건 확정 전에는 전면 공개를 꺼려하는 내부 분위기도 있었으나 이를 마침내 극복하였다는 점에서 보람을 느끼게 하는 사건이었다.

언젠가 이곳 캄보디아의 유엔인권기구 대표와 만나 법의 지배(Rule of Law) 수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는 판결서가 거의 공개되지 않는 현실이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호소하였고 이에 공감한 필자가 현지 판사들에 대한 강연 기회에 이 문제를 언급하였더니, 그들은 대법원 홈페이지에 주요 판결을 선별적으로 공개하고 있으며,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반론을 제기하였다. 우리나라에서도 판결서 공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사법개혁 과제의 하나로 다루어져 왔다. 원칙에 대한 이견이 아닌 개인정보보호 방법론에 대한 논쟁이 장기간 계속되고 있고, 사법부 내에서는 우리나라 특유의 개인정보 관련 법제와 현실적 제약 등을 이유로 전면 공개에 대해 주저하는 분위기도 있는 것 같다.

안타깝게도 지금 우리 사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 수준은 최악의 상태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법부 독립에 대한 우려 없이 민주적 통제를 강화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방안은 판결서 및 관련 서류의 원칙적인 전면 공개 및 이에 대한 비판의 활성화라고 생각한다.

판결서 등 사법 관련 기록에 대한 완전한 접근 없이는 충분한 시민의 권리 보장은 물론 법학 연구와 교육 및 관련 산업의 도약을 기대하기 어렵다. 나아가 이를 통하여 국제기준에 더 맞는 재판제도를 구축할 수 있고, 재판의 결과만을 두고 벌어지는 근거없는 비난과 억측도 어느 정도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이곳 재판에서 관련 기록의 공개를 원하는 당사자가 준비서면에 인용하는 클리셰(cliche)는 미국 브랜다이스 대법관의 “햇볕이 최선의 살균제(Sunlight is said to be the best of disinfectants)”라는 말이다. 현재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리 사법부에 햇살이 가득한 날이 반드시 올 것으로 믿는다.

 

백강진 재판관 (크메르루즈 특별재판소)

미국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