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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언

사티의 '짐노페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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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이 음악을 가만히 듣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

한 음 한 음, 심장을 톡톡 두드리듯이 고독한 소리의 울림이 밀려온다. 슬픔이 가슴을 두드리고 그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피아노 소리는 두드림을 반복한다. 풀어주지 않고 차곡차곡 쌓인다. 벗어나고 싶은데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반복, 이 반복은 어디서 끝나는 것일까.

그는 애써 위로하려 들지 않는다.

사람들은 언제 관용이라는 것을 생각할까? 결국 관용은 일이 다 끝난 다음에나 가능한 것인가? 관용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결혼식 날 자신의 친지와 동료와 자신의 소중했던 모든 사람들이 피를 흘리고 죽어 나갔을 때 앙리 4세의 마음속에는 관용이라는 단어가 들어설 틈이 없었을 것이다. 그가 반대파를 포용하는 낭트 칙령을 반포했을 때는 모든 것이 마무리되었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정통성과 탁월한 리더십을 갖춘 국왕은 관용으로 자신의 지배력을 더욱 확산시켰다.

프랑스의 피비린내 나는 역사를 통하여 터득한 톨레랑스(tolerance)는 우리말 ‘관용’과는 약간 다른 어감을 가진다. 톨레랑스는 관용, 아량, 포용력을 포괄하는 것으로 자기와 다른 신앙과 사상, 행동 방식을 용인한다는 뜻이다.

사람은 누구나 관용을 베푸는 주체이면서 또 관용의 대상으로서 살아간다. 미국의 정치철학자 마이클 왈쩌(Michael Walzer)는 유태계 미국인으로서 자기 자신을 관용의 대상으로 생각하며 자랐다. 뒤늦게 자기 자신이 모든 사람을 관용해야 하는 주체임을 깨닫게 되었다. ‘관용에 대하여’라는 책에서 그는 말한다. “관용은 차이를 용납하며, 차이는 관용을 필요로 한다.” 나와 다른 선택을 받아들이고 서로 다른 삶을 용인하는 것이 관용이다. 숨 쉴 공간을 만들어주는 관용이 없이는 다채로운 삶이 공존하기 어렵다.

프랑스의 음악을 들으면 틀을 벗어던진 상상 속의 자유로움이 느껴진다. 에릭 사티의 짐노페디를 들으며 그 고독의 끝이 어디였을지, 우리의 고독은 얼마나 깊어야 할지 생각한다. 한없이 가벼운 음을 쉽게 벗어던질 수 있을 것 같은데도 그 가벼운 음을 끝내 내던지지 못한다. 프랑스 역사와 사상이 깨우쳐준 관용의 정신은 프랑스 음악에도 배어 있었던 것이다.

 

전현정 변호사 (법무법인 KC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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