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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빌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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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암송하고 있는 사도신경의 내용을 보면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라는 문구가 등장한다. 초대 교부들은 예수의 죽음이 빌라도의 오판 때문으로 본 듯하다. 총독 빌라도는 재판 중 예수에게 3차례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그는 유대민중들의 거듭된 사형요구에 민란이 두려워 사형선고를 했다. 소크라테스는 어떤가. 잘못된 사상으로 청년들의 영혼을 오염시켰다는 이유로 배심재판에 회부된 후 독배를 들었다. 두 재판은 재판의 독립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일깨워 주고 있다. 교회는 빌라도가 재판관으로서의 무거운 책임감을 저버린 행동을 정죄했으나, 지동설을 받아들인 갈릴레오를 신성모독죄로 법정에 세우는 오류를 범하기도 했다. 이처럼 재판의 역사는 재판관의 독립된 판단이 얼마나 중요한지 가르쳐준다. 또한 재판은 민주주의의 실현장이 아닌 양심의 선언장이 되어야 한다. 재판은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우나 양심으로부터는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런데 최근 한국사회에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재판결과에 대한 여론의 반응을 보면 재판부의 독립이 가능할까 우려스러울 때가 있다. 재판이 진행되기 전 언론은 특정인을 단죄한 후, 혹여 자신들이 예측한 결과와 다른 결론이 내려질 때면 재판에 대해 혹독한 비판을 가한다. 후속 조치로 판사에 대한 심판이 진행된다. 나는 이 같은 장면을 볼 때면 반사적으로 하퍼리가 지은 '앵무새 죽이기'를 떠올린다. 무죄임에도 백인들로 구성된 배심원에 의해 유죄 평결을 받은 흑인 톰. 주위의 반대와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용기있게 변론을 한 핀치 변호사는 국선변호를 반대하는 6살의 딸 스카웃을 설득했다.

“다수결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 한가지 영역이 있다면 바로 인간의 양심이란다.” 물론 모든 재판이 재판관의 양심에 따라 이루어진다고 볼 수는 없다. 간혹 굽은 판결을 할 때도 있다. 그러나 이 같은 부작용에 대한 반발로 일부 언론과 군중심리가 판결내용을 강요하는 현상이 확장되면 어떻게 될까. 재판의 독립성은 여지없이 무너져 버리고 말 것이다. 여론몰이에 의한 다수결, 다수결이 강요하는 판결, 필연적으로 빌라도 재판의 재현장이 되고 말 것이다.

 

박상흠 변호사 (부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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