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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신화 속 재판 이야기 -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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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녀는 내연관계에 있던 남성과 공모하여 자신의 남편 을을 살해하였다. 갑녀와 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병은 아버지 을의 복수를 위하여 어머니 갑녀를 살해하였다. 이 경우 병의 죄책은?

현행 대한민국 형법의 관점에서 보자면 지극히 간단한 사안이다. 병의 행위는 존속살해죄의 구성요건에 해당하고, 사적 제재는 허용될 수 없으며 그 밖에 위법성 조각사유나 책임 조각사유도 없으므로 존속살해죄가 인정될 것이다. 다만 아버지의 복수라는 동기가 구체적 사정에 따라 양형요소로 참작될 가능성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와는 다르게 생각했던 모양이다. 위 사안은 고대 그리스의 극작가 아이스킬로스(BC 525?~BC 456)의 비극 『오레스테이아』 3부작에서 가져온 것이다. 여기서 을은 트로이 전쟁의 그리스군 총사령관으로 유명한 아가멤논이며, 갑녀와 병은 각각 그의 아내와 아들인 클리타임네스트라와 오레스테스다.

익히 알려진 신화로부터 소재를 차용한 『오레스테이아』는 「아가멤논」,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 「자비로운 여신들」의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것은 제3부 「자비로운 여신들」로서, 오레스테스의 행위를 심판하기 위한 신들의 재판이 묘사되고 있다. 신이 인간을 심판하기 위해 재판을 연다는 발상도 재미있지만(국내에서 웹툰과 영화로 크게 흥행한 『신과 함께』가 떠오르기도 한다), 재판 과정에서 오가는 변론들이 현대인과는 다른 고대인의 사고방식을 반영하면서도 그 나름의 논리를 갖추고 있어, 신선한 지적 자극으로서 음미해 볼 만하다.

제1부와 제2부의 줄거리를 간단히 소개하자면, 아가멤논은 트로이 원정에서 돌아온 직후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와 그녀의 내연남 아이기스토스에 의해 살해당한다(그들이 아가멤논을 살해한 데는 간통 이외에도 복잡한 동기가 있지만 이는 제3부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으므로 생략한다). 이에 오레스테스는 아버지 아가멤논의 복수를 위해 클리타임네스트라와 아이기스토스를 살해한다.

사적 제재가 정당행위로 간주되던 시대였으므로 아이기스토스를 살해한 행위는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클리타임네스트라는 그의 아버지의 원수인 동시에 그의 어머니이기도 하다는 사실이 문제였다. 어머니를 살해한 패륜의 대가로 오레스테스는 머리칼이 뱀으로 되어 있고 눈에서 피를 뚝뚝 흘리는 무시무시한 복수의 여신들에게 쫓기게 된다. 「자비로운 여신들」은 오레스테스가 아폴론의 신전을 찾아가 구원을 비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아폴론 신은 오레스테스를 지켜 주겠다고 약속하고, 그를 넘기라는 복수의 여신들의 요구를 완강히 거절한다. 결국 신들은 오레스테스를 둘러싼 시시비비를 재판에서 가리기로 한다. 신화의 세계에서 형사재판이 개시되는 셈이다. 복수의 여신들이 검사의 역할을 맡고, 아폴론이 변호인의 역할을 맡는다. 지혜의 신인 아테나 여신이 재판장이 된다. 아테네 시민들이 배심원으로 참여한다.

이제 복수의 여신들과 아폴론의 변론 공방이 펼쳐진다. 사실관계나 법리가 주된 쟁점이 되는 현대의 형사재판과 달리 여기서는 윤리적 쟁점이 부각된다. 핵심 쟁점은 “아버지가 더 중요한가, 어머니가 더 중요한가” 하는 것이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하고 유치원생에게나 던질 질문 같지만 양측은 자못 심각하고 치열하게 논쟁한다. 마치 대법원 판례를 인용하듯, 권위 있는 신들의 행적에 관한 다른 신화 속 사례를 논거로 제시함으로써 자신의 주장을 강화한다.

(이하 본문 인용은 천병희 역 『아이스퀼로스 비극』, 단국대학교 출판부, 1998 출판본에서 발췌)

“그대의 말에 따르면, 제우스는 아버지의 죽음을 더 중시하는데, 그 자신은 연로한 크로노스를 묶지 않았던가요? 그대는 그대의 말이 이 사실과 모순된다고 말하지 않겠소?”

복수의 여신들은 제우스가 자신의 아버지 크로노스를 묶어서 감금한 사례를 인용함으로써, 아버지가 더 중요하다는 아폴론의 주장을 반박한다. 이에 대해 아폴론은 “크로노스 신은 족쇄를 풀 수 있지만, 사람은 한 번 죽으면 다시 소생할 수 없다”며 위 사례를 사안에 적용할 수 없다고 재반박한다. 그리고 아폴론의 기상천외한 변론이 이어진다.

“어머니는 그녀가 자기 자식이라고 부르는 자의 생산자가 아니라, 새로 씨 뿌려진 태아의 양육자에 불과하오. (중략)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내가 증거를 대겠소. 어머니 없이도 아버지가 될 수 있기 때문이오. 저기 올륌포스 주신(主神)의 따님이 우리의 증인이오, 그녀는 자궁의 어둠 속에서 양육되지 않았으니까요.”

어머니 없이 아버지만으로 아이가 태어날 수 있다니.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황당하다 못해 해괴한 소리지만, 유럽에서는 이 작품의 창작 연대보다 훨씬 후대인 중세에도 아기는 남성의 정자 속에 이미 완전한 형태로 들어있으며 여성의 태내에서 단순히 크기만 자라나는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연금술사들은 정자를 인공적으로 배양해서 여성의 개입 없이 생명을 탄생시키려는 어처구니없는 실험에 매달리기도 했다.

하물며 바로 그 변론을 듣고 있는 재판장 아테나 여신이 제우스의 머리에서 태어났다는 신화까지 논거로 제시하니, 신화의 세계에서는 그것도 나름 설득력 있는 주장이 될 수도 있겠다.

변론은 그쯤에서 종결되고, 배심원들의 투표에 의해 판결이 내려진다. 결과는 유죄의견과 무죄의견이 동수. 아테나는 유죄의견이 과반에 못 미침을 이유로 오레스테스에게 무죄를 선고한다. 결과가 그렇게 나온 것은 인간의 지혜로는 결론을 내릴 수 없는 문제임을 의미한다는 후대의 해석이 있다.

아테나는 재판이 열린 장소인 아레오파고스가 앞으로도 도시의 정의와 질서를 지키는 재판정으로 기능할 것임을 선언한다. 아레오파고스는 실제로 고대 아테네에서 사법과 행정을 전담하던 평의회가 열리던 장소였으며, 오늘날 그리스 대법원은 그 자리에 있지는 않지만 여전히 같은 이름으로 불린다. 결국 『오레스테이아』는 인간 사회에서 재판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그 기원을 설명하는 신화인 것이다.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비롯한 다른 문헌들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고대 그리스는 현대 사법제도가 기초적인 형태를 갖추고 태어난 요람이었다. 『오레스테이아』는 사법제도의 기원을 신화적 상상력으로 흥미롭게 재구성하면서, 논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기를 좋아하던 그리스인들의 합리주의적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게 해 주는 걸작이다.

 

박우근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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