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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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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순 노파가 이웃집 노인의 바지 뒤춤에서 5만원을 절취한 사건에 대해 즉결심판을 한 적이 있다. 피고인을 호명하니 한 노인이 노파를 부축해 나왔다. 할머니는 거동도 불편했지만 인지능력에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이름과 생년월일을 묻자 ‘뭔 일이래’라는 표정으로 딴청을 피우신다. 법정은 대기 중인 피고인들로 만원인 상황. 속으로 경찰을 원망하면서 할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어떻게든 재판을 마치기로 마음먹었다. 할아버지를 할머니 뒤편에 앉히고 다시 물었다. “할머니, 뒤에 계신 분은 누구세요?” 한순간의 망설임 없는 명랑한 답변이 날아들었다. “응, 우리 자기!”

재판과 기억은 떼려야 뗄 수가 없다. 객관적 증거 없는 재판은 기억을 재구성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기억이 없으면 사실도 없다. 기억은 존재의 집이기도 하다. 알츠하이머가 두렵고 고통스러운 것은 사랑하는 이의 스러짐 때문만이 아니라, 그이의 기억에 존재하는 나와 우리의 사멸을 지켜봐야 하기 때문이다.

카뮈는 이방인에서‘생의 저녁에 이르면 얼마나 가졌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사랑했는가를 놓고 심판받을 것이다’라고 했지만, 생의 어느 지점에 서 있든 사랑받고 사랑한 기억보다 더 의미 있는 것이 또 있을까? 나 역시 사랑하는 이와 힘들었던 시절, 서로의 마음을 뭉근하게 졸이고 졸였을 때, 분노와 원망은 날아가 버리고 한 줌이라도 남는 감정이 오직 사랑이기만을 얼마나 희망했던지. 그것이면 충분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법정에는 사랑의 기억이 소송에 방해만 된다고 여기는 사람들 천지이다. 서로의 악행을 발고하기 바쁜 이들도 한 때는 뜨겁게 사랑하는 사이였겠지만, 기억을 지우고 지워 완벽한 적이 되어 만나는 곳이 바로 법정이다.

중증의 치매로 보이던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온전히 기억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두 분 사랑의 내력이 보통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할머니의 생은 이제 거의 저물고 아름다운 기억도 대부분 사라졌지만, 삶이 다 졸아든 자리에 사랑하는 이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다면, 그나마 견디실 만하지 않을까.

벌금 5만원을 선고유예하며 한 말씀 드렸다. “할머니, 우리 자기하고 조심해서 가세요.” 다음 사건도 잊은 채 서로를 의지하며 천천히 떠나시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존재의 진짜 집은 기억이 아니라 사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박주영 부장판사 (대전지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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