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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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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기를 머금은 눈은 보통 눈보다 3배 정도 무겁다. 습설(濕雪)이다.

난분분 난분분 팔랑이는 눈발은 보기와 달리 조용하지만, 젖은 눈은 소란스럽다. 챠르륵 챠르륵 우산을 두드리며 이야기를 건넨다. 습설은 사연 많은 눈이다.

큰 눈 내린 날, 우산을 받치며 법원을 들어서다 사람들과 눈이 마주쳤다. 눈도 제대로 털지 못하고 아침부터 법원을 드나드는 이들 역시 사연 많은 사람들이다. 각자의 이야기를 품안 가득 안고, 각자의 법정으로 뿔뿔이 흩어진다. 잿빛 얼굴의 저 남자는 한동안 집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고, 눈이 퀭한 저 여자는 한참을 잠 못 이룰 것이다. 볼이 움푹 팬 저 노인은 벌금을 못 구해 노역을 살 것이고, 아들을 잃은 저 노파는 재판이 끝나기를 하염없이 기다릴 것이다. 눈물과 고통마저 계량하여 일일이 값 매기는 비정한 법정에서 슬프고 가슴 아픈 이야기를 꺼내고 또 꺼낼 것이다.

그들이 준비해 온 사연의 반에 반도 못다 얘기했음을 알면서도, 뒷 사건으로 채근하며 겨우 8시 쯤 사무실로 올라왔다. 창밖에는 눈이 계속 내리고 무거운 이야기들은 무겁게 법원을 다시 나선다. 충실히 듣겠노라 매번 다짐하지만 빽빽한 기일표를 보면 늘 한숨이다. 성의껏 들었다는 말도 해선 안 된다. 그들의 성의는 언제나 내 성의의 백만 배 이상이다.

오늘 밤도 어디선가 습설에, 풀썩 풀썩 함석지붕이며 비닐하우스 주저앉는 소리가 들릴 것이고, 재판을 마친 나도 갖가지 사연의 무게에 다리가 꺾이는 것 같다. 늦저녁 법원을 나서며 받친 우산 위로 눈이 다시 이야기를 시작한다. 뒷눈에 쫓기지 않고 우산 한 개의 사연에만 집중한다. '먼저 간 사람의 발자국이 길이 된다'는 답설(踏雪)의 경구를 마음에 품고, 후배들을 위하여 반걸음조차 조심히 걷던 분의 모습이 보인다. 늦게 법원으로 와 여러 가지로 마음이 어지러울 때, 무작정 따라 걸었던 선배 법관이 계셨다. 잘 따라 걷고 있는지 늘 궁금했는데, 어느덧 나를 따라 걸을 누군가도 걱정할 처지가 되었다.

재판 뒤 밀려드는 상념처럼 눈이 멈추지 않는다. 한 움큼 꾹꾹 눌러 뭉치면 눈물이 주르륵 흐를 것만 같은 그런 눈이다. 법원 주위에 내리는 눈은, 언제나 습설이다.

 

박주영 부장판사 (대전지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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