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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술 이야기

(82) 이순신 신도비문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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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명에 의해 세운 이순신 장군의 신도비의 비문 탁본첩이다.

정조는 이순신을 영의정으로 증직하고 그의 신도비를 세울 것을 명했는데, 이 때 친히 글을 짓고 이순신의 공적과 충절을 생각하여 후손에게 공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송나라 부필(富弼)의 묘비 제목을 전서로 썼던 예에 따라 이 신도비의 제목도 전서로 ‘상충정무지비(尙忠旌武之碑)’라 친히 쓰고 내용의 글은 정조가 친히 지었다. 글씨는 안진경의 가묘비(家廟碑)에서 글자를 집자하였다. 안진경은 당나라 때의 명필이자 국가를 위해 충절을 다했던 명신으로, 안진경의 글씨를 비문에 사용함으로써 더욱 이순신의 충정을 빛나게 하고자 한 것이다.

비는 현재 충남 아산의 충무공 묘소 앞에 서 있다. 1693년에 김육(金堉)이 지은 비문으로 세운 ‘충무공 신도비’와 구별하기 위해 ‘어제 신도비’라 달리 부르기도 한다. 신도비란 2품 이상의 고관이 죽었을 때 무덤 앞이나 제일 가까운 길목에 그의 살아온 행적, 즉 일대기를 적어 놓은 비를 세워 이런 내용의 휼륭한 사람이 여기에 묻혀 있으니 지나가는 사람들은 말이나 가마에서 내려 경건한 마음으로 지나가게 하는, 죽은 사람에 대한 최고의 예우를 하는 것이다.

정조는 역대 어느 임금보다도 이순신을 추모하는 정이 깊었던 군주로, 비의 머리에 상충정무지비(尙忠旌武之碑; 충을 드높이고 무를 드러내는 비)라 하여 이순신에게 신하로는 최고위 직인 영의정으로 추증한 직후인 1794년, 이순신의 일생을 네 글자로 집약하여 비의 제목을 삼고 세우게 했다.

‘우리 선조께서 나라를 다시 일으킨 공로는 오직 충무공 한 분의 힘에 의함이라, 이제 충무공에게 특별히 비명을 짓지 아니하고 누구 비명을 쓰랴’(以基我烈祖中興之功者維忠武一人之力是賴不於忠武特銘之而誰銘)’

정조는 문체가 세도(世道)에 관련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당시 유행하던 명말 청초(明末 淸初)의 문집과 패관소설류, 서학서(西學書)와 북학파의 소품(小品) 등이 기본 질서에 배치된다고 여겨 문풍을 혁신하여 조선 개국 이래 치세의 기본이념인 숭유중도(崇儒重道)를 구현하고자 하였다. 이를 정조의 문체반정(文體反正)이라 부른다.

이 문체반정의 대안으로 성리학의 기본서인 육경(六經)을 기본으로 하고 제자서(諸子書)를 보조로 삼아 글을 지어야 국가를 빛내고 후세에 모범이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정조는 문풍만 반정(反正)시키려 한 줄만 아는데, 정조는 당시의 서풍(書風)도 문체반정만큼 중요하게 여겼다.

정조의 문집인 '홍제전서(弘齋全書)'에 이런 내용이 있다. "왕희지도 필요 없고 종요(鍾繇)도 필요 없으니 한마디로 말해서 돈실원후(敦實圓厚; 정성, 충실, 두텁고 모가 나지 않음)하고 침착타첩(沈着妥帖; 침착, 온화, 부드러움)해야 한다." 바로 이 여덟 글자가 정조가 서체반정을 통해 궁극적으로 이루려 했던 글씨다.

명필의 글씨도 아니고 기교가 있는 글씨도 아니고, 두텁고 모나지 않으며 장중한 글씨를 원했다. 정조가 이런 글씨에 가장 적합하다고 여긴 서예가가 바로 안진경(顔眞卿)과 유공권(柳公權)이었다. 하여 정조가 안진경의 글씨에서 집자하여 세운 비가 이 이순신 신도비다. 이 탁본첩은 장정한 겉표지 등 전체적인 느낌으로 보아 아마도 세울 당시 탁본을 떠서 4대 사고와 규장각과 태학에 나누어 보관하게 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중의 하나일 것이다.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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