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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술 이야기

(81) 백하서첩(白下書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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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하서첩은 백하 윤순(白下 尹淳: 1680-1741)의 크고 작은 해서, 행서, 초서로 된 글씨 모음집이다. 백하의 글씨 중에 이만큼 다양하게 쓴 서첩은 드물다. 보물로 지정된 고시서축(古詩書軸)도 다양하기는 이 서첩을 따를 수 없고 그 대신 표암(豹菴 姜世晃: 1713-1799)이나 이계(耳溪 洪良浩: 1724-1802) 등의 발문이 붙어 있어 백하 글씨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은 되지만 이 첩은 두 군데 씌어 있는 관지와 글씨를 부탁한 사람에게 보낸 서찰이 붙어 있어 받은 사람과 쓰게 된 동기를 알 수 있어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백하는 윤순의 호이다. 그는 자가 중화(仲和), 본관은 해평으로, 유명한 오음 윤두수(梧陰 尹斗壽: 1533-1601)와 월정 윤근수(月汀 尹根壽: 1537-1616) 형제의 5대손이다. 그는 백하 외에 학음(鶴陰), 만옹(漫翁) 등의 호를 썼으며 양명학자 하곡 정제두(霞谷 鄭齊斗: 1649-1736)의 동생인 정제태(鄭齊泰)의 사위이다. 벼슬은 대제학, 예조판서 등을 지낸 학자이자 정치가이며 당대 서예계의 중심에 있던 소론의 명가 집안사람이다. 아울러 원교 이광사(圓嶠 李匡師: 1705-1777)와 송하 조윤형(松下 曹允亨: 1725-1799)으로 글씨의 맥을 이어지게 해 조선 후기 서예계의 새 지평을 연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그의 글씨는 조선 초기 유행하던 송설체의 굳세고 유려함과 석봉체의 장중하고 순박함보다는 송나라의 미불과 명나라 초의 문징명(文徵明), 동기창(董其昌)의 정묘하고 유려함을 본받아 조선후기 사대부 대부분이 동기창체를 구사하는데 일조를 하였다. 그리하여 송명(宋明) 서예가의 장점을 잘 소화하여 모든 글씨를 자유자재로 구사하였으며 어떤 체를 써도 격조가 있고 수미(秀媚)한 글씨를 썼다. 그래서 그 같은 글씨체를 일러 백하체(白下體)라 불렀다.

이 서첩은 이러한 백하의 장점이 잘 드러나고 또 백하 글씨에서는 보기가 쉽지 않은 종요체(鍾繇體)로 쓴 해서를 비롯하여 여러 계통의 해서와 약간씩 다르게 쓴 행초(行草: 행서와 초서를 가르킴)의 맛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서첩에는 ‘기축 유빈중화위 이익지서모면십폭(己丑 ?賓仲和爲 李益之書毛面十幅: 1709년 5월 윤순은 이익지를 위해 모면지 10폭에 글씨를 썼다) / 세기축궁납중화위 이익지서우장한산하(歲己丑窮臘仲和爲 李益之書于長寒山下: 1709년 12월 윤순은 이익지를 위해 장한산 밑에서 이 글씨를 쓴다)’라는 두 개의 관지가 있다. 이 관지를 볼 때 1709년 5월과 12월 이하영(李夏英: 자가 益之이다)에게 써 준 글씨라는 것을 알 수 있고, 또 끝에 이하영에게 준 간찰이 있어서 이 서첩이 어떻게 만들어 졌는지도 알 수 있다. 즉 이하영이 처음에 모면지(毛面紙: 毛邊紙, 毛綿紙인듯) 10장을 가지고 와 백하에게 글씨를 부탁하자 각체로 12조목의 성리학(性理學) 관련 글을 써주고 다시 그 해 겨울에 또 글씨를 부탁을 하자 해서·행서·초서로 두보(杜甫)의 시 9수를 백지 26면에 써 준 것이 바로 이 서첩이다. 하여 이 서첩은 전체가 36면이며 끝에는 조금 늦어진다는 내용의 백하 편지가 붙어 있다.


이하영의 벼슬은 의금부 도사(義禁府 都事)였지만 최석정(崔錫鼎: 1646-1715), 최창대(崔昌大: 1669-1720) 부자와 이하곤(李夏坤:1677-1724) 등 당대 소론에서 행세하던 사람들과 가까이 지냈던 사람이지만 그 이상의 행적은 자세히 알려진 것이 없다.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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