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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생활

[나의 문화생활] 발레 '마린스키 백조의 호수'를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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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이는 비즈의 물결이 브이(V)자로 깊게 흐르는 검은 색 상의를 입고 연회장에 들어서는 지그프리드를 보는 순간, 잠깐 숨이 멎었다. 어릴 적 동화 속에서 본 듯한 상상 속의 왕자님이 거기 있었다. 술잔을 얼굴 높이로 들어 보인 후 한 모금 마시는 동작에서도 기품이 넘쳤다. 아직 턴 한 번, 점프 한 번을 하지 않았는데 나는 벌써 이 지그프리드에게 푹 빠져 버렸다. 


러시아 프리모스키 스테이지 발레단의 내한공연을 두고 이 공연이 ‘마린스키’공연이냐 아니냐로 작은 논란이 있었지만(마린스키 프리모스키 발레단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마린스키 극장의 산하 단체이고, 마린스키 극장의 발레단 중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마린스키 발레단은 모스크바 볼쇼이 발레단과 함께 러시아에서 제일 유명한 발레단이다) 김기민의 공연을 보고 싶은 마음에 개의치 않고 예매를 했다. 김기민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마린스키 발레단의 수석무용수로, 동양인 남성 최초로 마린스키 발레단에 들어간 촉망받는 무용수이고, 작년에 무용계의 아카데미상이라 불리는 ‘브누아 드 라 당스’상을 수상한 세계적인 무용수이다. 게다가 발레곡의 대명사인 백조의 호수라니. 우리 집 5살짜리 막내도 따 라라라라 라 라라 하는‘정경’의 멜로디를 들으면 “이거 백조의 호수 아니야?”하고 아는 척을 할 정도로 백조의 호수는 차이코프스키의 3대 발레곡 중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마법에 걸려 낮에는 백조로 살아야 하는 오데트에게 반한 지그프리드가 영원한 사랑으로 오데트를 마법에서 구하고자 하였으나 마법사의 간계로 오데트로 변장한 오딜에게 청혼을 해 버린 황당한 상황의 이야기도 누구나 알고 있다. 이렇게 발레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백조의 호수를 김기민의 공연으로 보러 갔다.

역시나. 김기민과 그 파트너인 빅토리아 테레아스키는 기대를 넘어서는 공연을 보여주었다. 김기민의 점프는 체공시간이 길기로 워낙 유명해서 어느 수준인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붕 하고 하늘을 살짝 나는 듯한 그 점프를 직접 눈으로 보니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가볍게 날아 올라 공중에서 잠깐 시간을 멈춘 뒤 슬로우모션으로 사뿐히 착지한다. 빠른 회전에도 축 한 번 흔들리지 않는다. 아름다운 실루엣과 기품 있는 동작, 시간을 조절하는 듯한 멋진 점프는 이 젊은 무용수가 왜 최초라는 수식어를 달고 사는지를 보여 주었다. 오데트/오딜역의 빅토리아 테레아스키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마린스키 발레단의 수석무용수답게 정말 아름다운 공연을 보여주었다. 긴, 정말 긴 팔을 손가락 끝부분까지 섬세하게 이용해서 표현하는 발레리나였다. 관절을 살짝 꺾은 팔을 뒤로 뻗었다 접었다 할 땐 정말 긴 목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깃털을 다듬는 백조 한 마리가 앉아 있는 듯 했고, 어떤 동작에서나 안정적인 기술과 풍성한 표현으로 화려한 매력을 보여주었다. 정말 아름다운 발레리나였다. 1막에서 둘의 2중무도 좋았지만 특히 3막에서 흑조가 되어 나타난 오딜의 빅토리아가 특유의 카리스마를 발산하면서 둘의 그림자 2중무에서 케미까지 터져서 빅토리아의 오딜에게 반해버린 나는 지그프리드에게‘빨리 오딜에게 꽃다발을 줘. 그냥 오딜하고 결혼해!’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였다. 특히 3막 마지막 오딜의 32회전(푸에떼 fouette)은 그 이전에 빅토리아가 보여준 기량과 표현으로 이미 멋질 것이라 기대했지만 그 기대를 100% 충족시켜주는 절정의 푸에떼였다. 왕자를 유혹해서 사랑의 맹세를 받아 낸 후 꽃다발을 왕자 얼굴을 향해 던져 버리고 바닥에 흩뿌려진 꽃송이들과 얼이 빠진 왕자를 뒤로 하고 나가버리는 오딜의 모습은 얄미워야 하는데 솔직히 멋있었다. 


두 무용수가 너무 강렬해서 백조들의 군무는 기억에 안 남고 둘의 2인무만 본 것 같아 그것이 아쉽다면 아쉽지만 정말 아름답고 우아한 오데트/오딜과 지그프리드 덕분에 감성 충만한 저녁이었다.

 

이윤정 교수 (강원대 로스쿨)

미국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