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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주말

신정아 미국변호사의 노르웨이 여행

울리켄山 아래 펼쳐진 신비로운 자연… 마음을 맡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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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베르겐에 소재하는 울리켄산에서 아래를 내려다본 전경. 구름을 머금은 산 중의 맑은 호수와 까마득히 펼쳐진 신비로운 자연이 어울려 장관을 연출하고 있다.

 

자연은 나에게 말한다. 쉬어 가라고. 길게 보라고.

일주일간의 치열했던 노르웨이 현지 소송이 끝나고 나는 큰마음을 먹고 5일이라는 긴 휴가를 냈다. 일을 시작한 뒤로 이렇게 오래 쉬는 건 처음이었기에 걱정 반, 설렘 반이었다.

노르웨이 변호사의 권유에 따라 나는 오슬로(Oslo)에서 베르겐(Bergen)까지 기차로 이동하기로 했다. 장장 6시간 넘게 걸리는 이 기차는 알고 보니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동수단이었다. 그 이유는 바로 6시간 동안 창밖의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기차여행을 좋아하는 나에겐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나는 학창시절 즐겨먹던 바게트 하나를 손에 쥐고 5일치 짐을 꾸린 배낭을 맨 채로 무작정 기차에 올라탔다.

기차에는 나처럼 배낭을 맨 활기찬 젊은이들부터 살아온 세월이 고스란히 얼굴에 묻어나는 60대 노부부까지 다양한 연령대가 이미 자리 잡은 상태였다. 나는 창가자리를 찾아 앉았고 그 순간 나와 대각선에 앉아계신 60대 후반 할머니 한 분과 눈이 마주쳤다. 할머니께서는 마치 손녀를 반기듯이 먼저 찡끗 웃어주셨다. 나의 여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베르겐은 따뜻한 도시였다. 비록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바람도 많이 불었지만, 자연은 포근했고 사람들은 맑았다. 노르웨이의 유명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그리그(Edvard Grieg)의 생가가 위치한 이곳은 클래식은 물론 매년 5월 재즈 페스티벌이 열릴 만큼 문화가 살아 숨쉬는 곳이었다. 나는 베르겐 출신인 'Kings of Convenience'의 앨범을 들으며 베르겐 골목골목을 누비다 소박한 레코드 가게를 발견하기도 했고, 오랜 전통이 느껴지는 카메라 가게에 들러 베레모를 쓴 멋쟁이 사장님으로부터 필름 두 통을 구입한 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베르겐을 찾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하이킹을 하기 위해서였다. 베르겐을 둘러싼 7개의 산(Seven Mountains)은 하이커들에게 매력적일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나는 7분마다 운영되는 케이블카에 올라타 베르겐의 가장 높은 산인 울리켄(Ulriken)의 정상에 도착했고, 거기서부터 나의 하이킹이 시작되었다. 가이드 없이 오로지 안내판에 나와 있는 지도를 보고 대략적인 방향을 잡고 큰 그림을 그린 후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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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에울란에 위치한 작은 마을 플롬에 여객선이 관광객을 실어나르고 있는 전경. 뱃길 주변을 걸어가는 하이킹코스가 환상적이다.

 

끝없이 펼쳐지는 자연 속에서 나는 나도 모르게 겸손해지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자연의 부드럽고도 강한 아우라는 왠지 모르게 나에게 위로가 되기도 했다. 정해진 길은 없었다. 발길이 닿는 대로 가면 그게 곧 길이었다. 걷다가 배가 고프면 아침에 챙겨온 사과를 꺼내 먹고, 비가 오면 우비 모자를 올려 쓰고, 그러다 지치면 잠시 쉬었다. 그렇게 걷다가 우연히 다른 하이커들과 마주치게 되면 반가운 마음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hello'라고 외치며 인사를 나누었다.

그 중 네덜란드에서 온 할아버지 한 분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 눈이 깊고 인자한 인상이 매력적인 할아버지는 3일 동안 자전거 여행을 할 계획이었지만, 베르겐의 자연이 너무 아름다워 하루는 하이킹을 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하셨다. 영어가 짧으셔서 비록 많은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할아버지는 마치 동화 속에 등장하는 어린 피터팬처럼 해맑고 행복해 보이셨다. "It’s beautiful here, isn’t it?" 그리고 잠시 대화를 나누는 사이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나중에 저 나이가 되었을 때 과연 나는 저렇게 열정적으로 살 수 있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생각에 잠긴 채 먼 산을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옆모습을, 나는 미소를 머금은 채 한동안 쳐다보았던 것 같다. 얼마 후 할아버지는 가던 방향으로 다시 발걸음을 돌리시며 손 인사와 함께 그렇게 유유히 떠났다. 나는 우리의 대화를 기억하고자 할아버지의 뒷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나의 하이킹 여정은 플롬(Flam)에서도 계속 되었다. 에울란(Aurland)에 위치한 플롬은 인구가 350명 정도 되는 작은 마을이었다. 배에서 내려 물길을 따라 천천히 걷다 보면 자연의 웅장함 속에 잔잔한 따스함이 스며들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느낌이 참 좋았다. 걸으면 걸을수록 신비로운 장면들이 펼쳐지고 가장 아름다운 꿈의 한 장면처럼 아련하게 아름다웠다.

한 시간 정도 걷다가 우연히 발견한 나무 벤치가 하나 있었다. 물가 옆에 만들어 놓은 이 벤치는 누가 만들었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그리고 언젠가는 소중한 사람과 다시 이곳을 찾아 함께 책을 읽거나 여유롭게 차 한 잔 하기 좋은 장소라는 생각도 들었다.

매일매일 치열하게 살아가는 우리는 어쩌면 생각할 틈도 없이 그냥 사는 대로 살아가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가끔은, 아주 가끔은, 일상을 벗어나 머리와 마음을 온전히 비우고 오롯이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여행 중 화려한 숙소나 호화로운 식사는 없었지만 무거운 마음으로 떠나 가벼운 마음으로 돌아온 소중한 여행이었다. 우연히 만난 이들과 나눈 진솔한 대화와 추억으로 꽉 찬 필름 세 통이 내가 이번 여행에서 얻은 최고의 선물이다.

노르웨이는 나에게 치유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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