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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술 이야기

(78) 사명대사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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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사람이 출가를 하면 본래의 성명은 버리고 불가의 이름을 쓴다. 사명당(四溟堂: 1544-1610)은 당호며 호는 송운(松雲) 이름은 유정(惟政), 속명은 임씨(任氏)다. 사명대사로 가장 많이 알려져 있다. 1599년에 직지사에서 출가하여 나중에는 휴정 서산대사의 의발 제자가 된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스승인 서산대사의 격문을 받고 의병승을 모아 스승을 따라 의병에 참가하여 혁혁한 공을 세운다. 그 중에도 1593년 명나라 군대와 같이 평양성 탈환 전투, 그 뒤 적진에 들어가서 적장 가등청정(加藤淸正)과의 네 차례에 걸친 회담 등은 스님의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사건이었다. 특히 1604년 초 스승 서산대사의 부음을 받고 묘향산으로 가던 중에 선조의 부탁으로 일본과의 강화를 위한 사신으로 일본에 건너가 8개 월 간의 긴 노력 끝에 3000여명의 동포를 쇄환(刷還)한 일은 스님이었기에 할 수 있었던 임란의 가장 큰 성과 중의 하나일 것이다.


여기의 글씨는 스님께서 선조의 부름으로 일본에 가서 포로를 데려온 1605년 4월, 바로 전달인 3월에 그 당시 많은 도움을 받은 일본승 현소(玄蘇: 1537-1611)의 부탁으로 그에게 써준 것이다.당시에 스님과 서산대사의 글씨는 선기(禪氣)가 넘친다고 하여 찾는 사람이 많았다고 하나 전해오는 작품이 거의 없다. 그러나 사명은 스님이라는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권율 장군이나 유성룡, 이항복 같은 분들과 함께 왜인과 싸웠기에 편지나 전별시(餞別詩)는 어쩌다 한두 점은 볼 수 있지만 이런 조일(朝日) 간의 사료적 가치가 있는 작품은 드물지 않을까 한다. 

 

경철현소(景轍玄蘇)는 호는 선소(仙巢), 본광국사(本光國師)이며 대마도 대마종주의 외교승이었으나, 임진왜란 때에 풍신수길의 국사(國師)로 종군하였다. 조선말을 잘하여 임란 전에 조선에 미리 들어가 조선 사정을 여러모로 염탐하였고, 사명스님이 1605년 포로 쇄환 문제로 일본에 가서 정부와 담판을 지을 때 많은 도움을 주었으며, 전쟁이 끝난 후에 조선과 일본의 정식 수교를 위해 동분서주하여 1607년 첫 번째 통신사를 직접 영접하였던 우리와는 특별한 인연이 있는 스님이다.

 

본법사(本法寺)의 선백(禪伯)으로 술을 즐기고 한적하게 노니는 걸 좋아하는 남선(南禪)의 장로 선소(仙巢) 형이 이백의 고체시 ‘월하독작(月下獨酌)’을 내게 써 달라하며 가까운 벽에 부처 두고 아침, 저녁으로 보고 읊으며 주흥을 돕는 자료로 삼고자 한다. 내가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노형의 뜻에 따라 쓴다. 1605년 늦은 봄에. 사명송운. / 먹세먹세 또 먹세나, 백년세월이 얼마나 되겠는가. 백년은 겨우 삼만육천일이며, 삼만육천일은 앉아서 세도 많지가 않네. 전광석화 같은 부생의 삶, 애써 참으며 마시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답(答)하겠는가. 이것이 선사의 생각일 터, 선사의 생각을 담아 이와 같이 적는다.


작품에서도 언급 했듯이 현소는 매우 술을 좋아하여 말년에 거주하던 암자의 이름이 이정암(以酊菴)이라 할 정도였다. 스님의 신분으로 그 참혹한 전쟁의 한 가운데서 활동을 하였으니 그 속에서 얼마나 괴로웠겠는가. 일반 사람도 술이 없었으면 아마도 견디기 어려웠을 것인데 하물며 스님의 몸으로 어떠하였겠는가. 사명대사의 날카로운 필획은 아직도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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