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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언

속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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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에서 패소한 의뢰인을 상담하는 일이 많다. 의뢰인은 판결문을 보여주며 “정말 엉망이죠?”, “판결만 봐도 얼마나 엉터리인지 바로 알 수 있죠?”라며 보조를 맞춰주기 바란다. 하지만 의뢰인의 기대에 응하기는 어렵다. 판결문만 본 상태에서 엉터리라고 말할 정도의 흠이 있는 판결은 사실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판결문에서 뭐라고 딱히 지적할 곳은 없네요”라고 말할 수도 없다. 이런 말을 뱉는 순간 고객의 얼굴은 이별을 직감한 연인의 얼굴처럼 일그러지고 수임가능성은 영(零)으로 수렴한다.


이런 딜레마적 상황에서 어느 때부터인가 이렇게 말하기 시작했다. “판결 받고 많이 속상하셨죠?”이 말을 듣는 순간 의뢰인의 얼굴은 갑자기 환해진다. 많이 속상했고 위로받고 싶었던 것이다. 속상함에 대한 이해로 공감의 기초를 쌓은 후 차분히 판결의 사실인정과 법리를 설명하면서 그동안 충분히 주장하고 증명하지 못한 것이 무엇인지 대화를 시작한다. 법률전문가로서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법률지식 자체보다 의뢰인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이 우선인 것이다.

미국의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인 말콤글래드웰의 저서 '블링크'(blink)에 따르면, 미국에서 의료과실로 소송을 당하는 의사들 상당수는 의료과실 자체보다는 환자를 대하는 태도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전문지식 이상으로 공감능력과 태도가 중요한 것이다.

얼마 전 큰 딸이 학교숙제로 인공지능(AI)으로 사라질 직업을 조사한 다음부터 아빠의 장래를 걱정하는 것이 표정에 역력하다. 걱정하는 딸에게 말해주고 싶다. 인공지능이 의뢰인과 첫만남에서 “많이 속상하셨죠?”라고 말할 때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다고.

 

정원 변호사 (법무법인 지평)

 

미국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