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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포럼

법과 양심에 따른 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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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관은 본질적으로 당사자 사이의 갈등뿐만 아니라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법관의 역할은 미리 정해진 법률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에 그치는 것인가. 헌법과 법률 속에서 잘 찾아내기만 하면 판결이 가능한 것인가. 판결이 수학공식처럼 대입만 하면 정답이 나오는 논리적 삼단논법의 결과인가. 그렇다면 인공지능(AI)도 재판할 수 있을 것이고 인공지능이 장착된 Watson이 판결을 더 잘 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는 법이 모든 사람에게 의심이 없을 정도로 명확하고 분명한 개념만 포함되어 있는 경우나 가능한 얘기다.

법 규정에 사용된 언어나 개념은 매우 다의적이다. 언어에 의해서 표현된 법 규정은 어느 정도 추상성과 불명확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가치충족을 요하는 요소를 갖고 있다. 양심적 병역거부가 병역법 제88조의 ‘정당한 사유’에 해당하는지 명확히 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종교나 신념을 이유로 병역을 거부하면 그것이 정당한 병역거부 사유인지를 법관이 여러 가지 요소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결정하는 것이다. 어느 요소를 중시할 것인가에 따라 유무죄의 다른 결론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사실인정에서도 증거의 취사선택이 법으로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자유심증주의와 법해석의 다양성 때문에 똑같아 보이는 사건도 서로 다른 판결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법언어가 추상적이고 불명확하면 할수록 여러 가지 해석적용의 대안 속에서 어떤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형태로 사법권을 행사하게 된다.

법관에게 부여된 해석의 여지가 넓으면 넓을수록 법관에 의한 재판의 정치적 성격은 강해진다. 인간사이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결정을 정치라고 한다면 이런 의미에서 사법도 정치적 성격을 띤다고 볼 수 있다. 문리적, 체계적, 역사적 및 목적론적 해석 등 다양한 해석방법 중에서 법관은 자신이 타당하다고 확신하는 결과를 근거지우기 위한 해석방법론을 선택해야 한다. 법관은 법률에 구속되지만, 법언어의 다양한 해석가능성 가운데 선택해야 한다. 거기에는 법관 개인적 특성, 전문적 경험, 양심, 신념 등 법외적 요소가 작용할 수 있고, 따라서 재판결과가 다를 가능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현직 판사가 ‘재판이 정치’라고 말했다가 보수 언론이나 법조인으로부터 뭇매를 맞았지만 어찌 보면 맞는 말인지도 모른다. 불신을 받고 있는 ‘정치’라는 단어를 선택한 잘못은 있을지라도.

그래도 사법은 대체로 균질성, 안정성, 통일성을 유지한다. 사법구성원의 행동양식과 사고, 성향과 취향, 가치체계가 법교육, 사법시험, 연수, 직무수행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유사해졌기 때문이다. 사법부 내의 인사제도나 상소제도 등 사법메커니즘의 영향도 있다. 그래서 대체로 상급법원의 판결을 따른다. 법관이 의지해야 하는 양심이 객관적인 법조적 양심이어야 한다고 보는 한 불쑥 튀어나오는 판결은 거의 없다. 그러나 그 법조적 양심과 객관적 양심이 무엇인지 실체가 불분명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있다고 하여도 이를 모든 판사에게 강요할 수 없기에 주관적 양심에 따른 판결도 간혹 나온다. 그렇더라도 이를 ‘튀는’ 판결로 매도해서는 안 된다. 그 판결도 법과 양심에 따른 고뇌에 찬 판결이기 때문이다.

하태훈 교수 (고려대 로스쿨)
미국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