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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생활

[나의 문화생활] 뮤지컬 '레베카'를 보고

첫 공연에 매료… 작품 무대에 올릴 때마다 보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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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본 공연에서 전율을 느껴 그 이후로도 그 작품이 무대에 오를 때 마다 꼭 보러 가야 하는 뮤지컬이 있는데, ‘레베카’는 내게 그런 뮤지컬 중 하나이다. 2013년 초연 이후 올해까지 네 번째. 거의 매년 무대에 오르는 걸 보면 아마도 이 뮤지컬을 특별하게 생각하는 뮤지컬 팬이 나 말고도 꽤 많은가 보다. 


진부한 우스개를 응용해서 이 뮤지컬에 대한 첫 멘트를 치자면, 뮤지컬 ‘레베카’에는 레베카가 나오지 않는다. 이름만 있는 그 여자 레베카, 이름이 없는 주인공 나(I). 그리고 바닷가의 음산한 맨덜리 저택. 이렇게 설정부터 범상치 않은 이 뮤지컬은 스릴러 장르답게 어두운 분위기와 숨 막히는 긴장감이 계속되는 중에 빠르게 전개되는 이야기와 후반에 휘몰아치는 거듭된 반전으로 관객으로 하여금 한 순간도 집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뮤지컬 ‘레베카’는 무대도, 노래도, 의상도 모두 멋지지만 무엇보다 캐릭터에 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는데, 이 뮤지컬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은 단 한 분도 평면적인 캐릭터가 없다. 빼어난 미모와 우아한 기품 이면에 다른 모습을 갖고 살던 이중적인 여자, 누구보다 영리하고 어떤 남자도 다 가질 수 없던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레베카. 

 

평생 레베카를 돌봐 왔고, 오로지 레베카의 신임이 인생의 전부였고 죽은 레베카의 빈 자리를 지키는 것만이 중요한 사명이었는데, 레베카에 대한 내 감정의 깊이와 레베카가 내게 준 감정의 깊이가 달랐다는 것을 알고 배신감에 레베카가 남긴 자리를 부숴버리는 댄버스 부인. 순수하고 다정하고 순진하지만 사랑하는 남편에게 위기가 닥치자 차돌처럼 단단해지는 나(I). 이런 다층적인 성격의 인물들을 세밀하게 그려낸 것을 보면 이 뮤지컬의 원작이 영국 작가 대프니 듀 모리에의 소설이라는 것을 몰라도 원작 이야기의 작가가 여성일 것임은 쉽게 추정할 수 있다. 서스펜스의 여왕이 만든 최고의 스토리에 최고의 무대와 넘버들이 더해져 환상적인 뮤지컬이 되었다. 

 


주인공은 막심 드 윈터와 나(I)이지만 사람들이 이 둘 보다 댄버스 부인 역의 캐스팅에 더 관심을 두는 이유는 댄버스 부인이 부르는 이 뮤지컬의 최고의 넘버 ‘레베카(2)’ 때문일 것이다. 가장무도회 사건으로 1막이 끝나고 짧은 인터미션을 보내고 나면 2막 첫 씬에서 바로 그 넘버가 나온다. 보통 1막 마지막 장면이 하이라이트인데 이 뮤지컬은 하이라이트 다음에 바로 다시 진짜 하이라이트이다. 맨덜리 서쪽 레베카의 방에서 바다를 향해 난 창문을 열고 발코니에 나가 거센 바닷바람을 함께 맞으면서 댄버스 부인과 나(I)는 격하게 부딪힌다. 어린 풋내기 주제에 감히 레베카의 자리를 차지하려 하는 나(I)를, 이미 전 날 가장무도회 사건으로 필살의 일격을 당하고 더 이상 버틸 힘이 없는 나(I)를 자살로 몰아가며 댄버스가 부르는 ‘레베카(2)’는 마치 바다로부터 레베카의 영혼을 불러 들이는 주술사의 광혼곡 같다. 이 때 바닷바람에 휘날리는 검은 치맛자락과 함께 댄버스 부인의 카리스마가 극장 전체를 압도하고 바로 이어 관객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성이 터지는 곳이기도 하다. 

 

그 외에도 나(I)와 사랑에 빠지면서 막심이 부르는 ‘놀라운 평범함’, 막심이 분노의 감정을 토해내면서 레베카와의 진실을 실토하는‘칼날 같은 그 미소’(a.k.a. 칼날송), 댄버스 부인이 레베카의 난초를 어루만지며 부르는 ‘영원한 생명’, 막심의 진실을 알게 된 나(I)와 동생 막심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도 할 수 있는 막심의 누나 베아트리체가 함께 부르는 ‘여자들만의 힘’ 등등 모든 넘버들이 귀에 착 붙는다. 

 
바닷바람처럼 거세고, 화염처럼 강렬한 이 뮤지컬이 올해는 더운 여름에 와 줘서 찌는 더위로 긴긴 여름밤을 서늘하게 해주니 더욱 행복하다.

 

이윤정 교수 (강원대 로스쿨)

미국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