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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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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년 전 어느 날 오전 서울고등법원 법정. 사건번호를 호명하고 원·피고 소송대리인을 확인한 재판장은 바로 원고 대리인에게 “변론하시죠”라고 말했다. 이 법정에 처음인 듯한 변호사는 상기된 얼굴로 “이 사건은 원고가 피고로부터 불법행위를 당하여 손해배상을 구하는 사건으로서…”라며 변론을 시작했다. 그러나 재판장은 “변론을 하시라고요”라며 다그쳤다. 영문을 모른 채 잠시 뜸을 들이다 “원심판결이 부당한 이유는…”이라고 다시 변론했지만, 재판장은 “변론을 안하고 왜 다른 이야기를 해요”라고 질책하며 피고 대리인이 먼저 변론하라고 했다. 이미 이 재판부의 진행방식을 알고 있던 피고 대리인은 “3월 4일자 준비서면 진술, 을 제5호증 제출”이라고 짧게 말했다. 재판장이 요구한 '변론'이었다.

특정 재판부나 판사의 ‘재판방식이나 성향’에 관한 ‘리스트’를 작성해볼 생각을 하게 된 것이 그 무렵이었던 것 같다. 소송변호사로서 재판에서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한 유용한 자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리스트는 작성되지 않았다. 논의결과 특정 법관에 대하여 재판성향 등에 관한 자료를 축적하고 공유하는 것은 개인정보보호를 포함해 다양한 법률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는 지적이 많았다. 더욱이 누구보다도 선입견에 사로잡히지 않아야 하는 변호사로서 재판부에 대한 선입견을 갖는 것이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지나고 생각해보니 잘한 일이었다. 재판부의 진행스타일에 대한 이해보다는 사건 자체를 충분히 이해하고 철저하게 변론을 준비하는 것이 변호사로서 더 중요한 책무였다.

개인정보를 수집하여 기록하고 저장하는 주체에게는 막강한 힘이 부여된다. 때문에 수집의 대상이 되는 정보주체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 있는 것이다. 본래 좋은 의도였다고 하더라도 정보가 기록되고 축적되는 이상 당초의 의도와 다르게 악용될 위험은 늘 존재한다. 사람에 대해 선입견을 갖는 것을 누구보다 경계해야 하는 법조인이라면 ‘리스트’의 위험에 더욱 예민해야 한다. 몇 해 전 변호사로 개업하신 그 재판장님이 법정에서 열심히 구두변론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사람은 변한다. 리스트는 위험할 뿐 아니라 무익하기까지 하다.

 

정원 변호사 (법무법인 지평)

미국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