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法臺에서

노력하려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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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배당된 사건을 대하면 어려운 내용이 많다. 아는 줄 알았는데 들여다볼수록 정확히 알고 있는지 의문일 때도 있다. 재판은 세상과 사람에 관한 일인데, 법 공부 뿐만 아니라 세상 공부와 사람 공부가 부족하여 아는 것만 알고 느끼는 것만 느끼기 때문이다.


어릴 적 Garden은 비싼 고깃집, Park는 여관인 줄만 알았다. 커서는 커피나 와인의 여러 맛을 식별할 줄 알고 남다른 영화를 보거나 여행을 다니는 것, 비가 오면 울적해지고 야밤에 슬픈 노래를 들으면 눈물이 맺히는 것에서 감수성의 징표를 발견했다. 흔하고 쉬워서다. 자연스레 법치주의는 ‘법질서 준수’로, 재판은 법원에 ‘받으러 오는’ 것으로 인식하였기에, 판사가 결론을 ‘내려주면서’ 당사자를 야단치거나 훈계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못했다.

 

그나마 이제는 평등한 자유, 법 안의 평등, 민주주의적 정의를 이해한다(고 믿는다). ‘판사라는 직업’이 고통받고 상처입은 마음을 어떻게든 위로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하지만 한쪽으로 ‘기울어진 세상’에서 무엇이 ‘공정한 재판’인지 점점 더 난해하다. 법원에 이르기 전에 이미 균형이 어긋나버린 이들도 법정에서는 같은 출발선에 서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공정한 것은 상대적이다. 편파적인 세상에서의 공정함은 또다른 편파밖에 없다”거나, “기울어진 세상에서 균형감각이 있다는 건 기울어져 있다는 뜻이다”라고도 한다. 그렇다고 법정에서 ‘고통 앞에서 중립은 없다-오직 고통받는 자의 편이다’는 입장을 그대로 취할 수는 없다. 법률과 양심에 따르면 되지 싶지만, 이 역시 부족하다. 법이 제정된 것은 그 내용이 옳아서가 아니라 다수가 그런 의견을 갖기 때문일 수도 있고, 법관들의 양심도 그 삶에 시대의 실상과 아픔이 얼마만큼 들어가 있는가에 따라 질이 무척 다르니까.

 

그럼에도 공정한 재판을 해내야 법관이기에, 사람과 사건에 대한 이런저런 판단을 훌쩍 내리지 않고 그에 오롯이 직면하여, 누구든 실컷 편파적이도록 보장한 후, ‘자신의 견해를 객관화하려는 신중함과 비판을 피하지 않는 정직함’으로 결론을 내는 과정에서 ‘노력하려는 마음’을 낸다.


법관은 재판으로 인해 삶이 위협받거나 절단되는 경험을 하지는 않는다.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을 감수할 일도 없다. 여러모로 “선량하게만 살다 떠나지 말고 좋은 세상을 남기고 떠나라”는 말은 법관에게도 잘 어울린다.

 

최기상 부장판사 (서울중앙지법)

미국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