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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포럼

덩케르크 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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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는 몇 가지 군사적, 정치적 실책을 범했다. 하나는 영국과 싸우면서 소련을 침공한 것, 다른 하나는 진주만 습격에 분노한 미국이 일본에 선전포고하자 독일도 미국에 선전 포고한 것이었다. 당시 강대국들을 전장에 끌어들임으로써 2차 세계대전의 큰 물줄기를 나치 독일에게 불리하게 되돌려 버렸다. 또 다른 하나는 개전 초기에 발생한 군사적 실책이었다. 1940년 5월 9일부터 프랑스에 대한 독일군의 공세가 본격화되었다. 독일군의 공세는 당시 혁신적이고 천재적인 군사전문가의 전략전술에 기반을 두었다. 만스타인(Erich von Manstein) 중장은 벨기에의 아덴산맥을 돌파하여 프랑스 북부의 강력한 방어선인 마지노선을 우회하여 프랑스를 침공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다른 군사전술은 구데리안(Heinz Guderian) 장군이 창안한 기갑 부대를 이용한 이른바 전격전(Blitzkrieg)이었다. 독일의 판저 19군(Panzer XIXthCorps)은 아덴산맥을 넘어 5월 13일 프랑스의 뫼즈 (Meuse) 강에 도착했다. 독일 공군의 강력한 엄호를 받은 판저 부대는 도하에 성공했다.

 

반면, 프랑스 기갑부대는 공군의 엄호를 받지 못한 상태에서 급격히 무너졌다. 프랑스 보병부대는 공포에 휩싸였다. 그들은 총과 대포를 버리고 도망쳤다. 현장 지휘관인 구데리안은 프랑스군의 땅에 떨어진 사기를 확인하고 “기름 한 방울이 다 할 때까지” 서쪽으로 진군할 것을 명령했다. 5월 16일 밤 구데리안은 라인하르트(Georg-Hans Reinhardt) 장군이 이끄는 판저 15군과 함께 프랑스 스당(Sedan)시 서쪽 55마일을 돌파했다. 영국의 원정부대(BEF)는 프랑스, 벨기에 부대와 함께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5월 22일 구데리안과 라인하르트의 기갑군은 덩케르크 10마일 앞까지 진군했다. 덩케르크로 진격하면 말 그대로 상황 끝이었다. 이 때 의외의 명령이 떨어졌다. “진군을 멈추고 자리를 지켜라.”현장의 지휘관들은 격분했고, 절망했다. 상급지휘관에게 설명을 요구했다. 총통의 명령이라는 것이 답변의 전부였다. 히틀러가 왜 이런 결정을 내렸는지 아무도 모른다. 당시 히틀러는 독일군의 믿지 못 할 승전보에 오히려 노심초사했다고 한다. 연합군의 속임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영국에 대한 유화 제스처였다는 다른 해석도 있다.

 

하지만 히틀러가 영국군의 철수를 막도록 하는 임무를 독일 공군에 맡겼다는 점에 비추어 믿기 어려운 설명이다. 현장을 무시한 탁상공론의 결과로 밖에 이해되지 않는다. 영국은 이 틈을 타서 5월 27일 밤부터 31일까지 영국이 동원한 온갖 선박을 통하여 34만명을 철수시키는데 성공했다. 20세기판 홍해의 기적이었다. 이 중 19만 8천명이 영국군이었다. 이 병력이 고스란히 보전되어 영국이 반격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또한 브룩(Alan Brooke), 몽고메리(Bernard Law Montgomery)와 같은 유능한 지휘관들이 살아 남아 복수를 다짐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덩케르크가 상영 중이다. 전쟁의 공포가 극대화된 연출과 영상이 인상적이라는 평이다. 외람되지만, 무더운 여름, 영화 삼매경에 앞서 역사적 맥락을 짚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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