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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언

'피고인'은 2인칭 호칭이 아니다!

권오곤 국제법연구소장 (한국법학원장, 김앤장 법률사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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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로 상대방을 부르는 호칭은 외국어에 비하여 참으로 어렵다. 외국에선 보통 웬만한 사이에는 이름(first name)만 부르면 되고, 존칭을 쓰려면 ‘미스터(Mr.)’ 또는 ‘미즈(Ms.)’를 붙여 성(姓)을 부르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정중한 호칭이 된다. 대화중에는 상대방 여하를 불구하고 그저 ‘유(you)’라는 2인칭 대명사를 사용하면 충분하다. 그러나 우리는 상대방을 부를 때는 꼭 성(姓)에 직책을 가리키는 호칭, 그리고 거기에다가 존칭까지 붙여 부르는 게 보통이다. "김 부장님", "이 국장님", "박 판사님" 이런 식이다. 각종 위계질서의 틀 안에서 서로 간의 적절한 관계를 규정하여야 직성이 풀리는 사회적 습관 때문인지 적당한 존칭을 찾아 불러주는 것이 중요한 일이 되었다. 때에 따라서는 상대방에게 어떻게 불러야 할지 묻는 경우도 곧잘 있고, 일정한 직업을 가졌던 사람의 경우에는 퇴직한 후에도 그 직책이 평생의 호칭이 되기도 한다.

존칭을 붙일 필요가 없는 아래(?) 사람에 대한 호칭도 이에 못지않게 어렵다. 예전에 지방으로 전근 갔을 때 법원의 사무보조원 여비서에게 "미스 김"이라고 불렀더니 영 어색해하며 부끄러워해하던 일이 기억난다. 서울에 근무할 때에는 여비서에게 "미스 김"이라고 불렀더니 “우리가 무슨 다방 종업원이냐”라고하며 기분 나빠했던 일도 있다. 


스스로 자신에게 존칭을 붙이는 우스꽝스러운 경우도 종종 본다. 외국인에게 자기를 소개할 때 그저 "I am Kwon" 이라고 하면 충분할 것을 "I am Mr. Kwon"이라고 스스로 존칭을 붙여 어색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우리말로 할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저는 권씨”라고 할 것이 아니라, “저는 권가(哥)”라고 하여야 한다. 또한 상대방에게 자기의 직책을 붙여서 소개할 때 "권오곤 재판관입니다"라는 식으로 자신의 성명 뒤에 직책을 붙이면 스스로에게 존칭을 붙이는 셈이다. 굳이 자신의 직책까지 붙여서 소개하여야 한다면 "재판관 권오곤입니다"라고 하는 것과 같이 직책을 먼저 이야기하여야 공손한 말이 된다.


위와 같이 일상생활에서 존칭이 남발되고 있는 것에 비하여, 형사 절차에서는 피고인이나 피의자를 적절하지 않은 호칭으로 부르는 경우를 많이 본다. 피의자 또는 피고인은 suspect 또는 accused/defendant를 우리말로 번역한 용어인데, 외국에서 ‘피의자’ 또는 ‘피고인’은 3인칭으로 쓰일 뿐, 2인칭으로 쓰이지는 않는다. 다시 말하면, 법정에서 재판부, 검사 또는 변호인 사이에 변론을 할 때나, 공소장, 준비서면, 판결문 등에서 피의자/피고인을 가리키는 3인칭 용어로 쓰일 뿐이지, 피의자/피고인을 바로 보며 “피고인, 일어나세요!” “피고인, 앞으로 나오세요!”와 같이 상대방을 부르는 2인칭 호칭으로는 쓰이지 않는다. 존칭을 사용할 때에는 예컨대, “판사님!”, “교수님!” 등과 같이 직책을 곧바로 부르면 되지만, 수사나 재판을 받는 사람에게 대놓고 “피의자!”, “피고인!”이라고 부르게 되면 비하(卑下)하거나 모욕하는 것 같이 들릴 수 있다. 외국이나 국제 법정에서 재판장은 피고인, 증인들을 성명을 붙여 “미스터/미즈 ㅇㅇㅇ”라고 부르거나, 이름 없이 부를 때에는 단순히 “선생님(Sir)!” 또는 “부인(婦人, Madam)!”이라고 부른다.


언필칭 피고인은 유죄 판결을 받을 때까지 무죄가 추정된다고 한다. 무죄 추정을 받는 피고인이 평생 처음 겪는 형사절차에서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도 잘 모를 용어로 불릴 때의 당황스러움을 생각해 보자. 아주 가까운 사이에만 쓸 수 있는 ‘너’를 제외하고는, 우리말에 2인칭 대명사 ‘유(you)’를 갈음할 적당한 말이 없기 때문에 다소 불편할 수는 있겠지만, 이름으로 불러주는 것이 옳다. 적어도 바로 피고인을 가리키며 그를 “피고인!”이라고 부르는 것, 그것도 큰 소리로 불러 세우는 것만큼은 지양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다. 외국에서 하듯이 재판장이 피고인에게도 성명에 ‘씨’를 붙여 “ㅇㅇㅇ씨!”라고 부르면 얼마나 법정 분위기가 훈훈해 질 것인가. 

(이 글은 필자가 속한 한국법학원이나 김앤장의 입장과는 관계없는, 필자의 사견임을 밝혀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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