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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술 이야기

(73) 소고서첩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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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글씨를 구경하다 보면 의외의 즐거움이 종종 있다. 이래서 한 취미가 큰 수장가로 바뀌는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 우연히 지방에 같다가 어느 서점에 들렸더니 서가에서 오래된 글씨 첩을 하나 꺼내 보여 주는데 제첨은 『학록필첩(鶴鹿筆帖)』으로 되어있다.

학록이란 어떤 사람의 호일 터인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생각나는 사람이 없다. 내용을 보니 백하(白下) 아니면 원교(圓嶠)의 글씨가 분명 할 것 같아서 자세히 살펴보지도 않고 흥정을 했다. 잘 알지 못하는 골동가게에서 물건을 자세히 살펴보면 매우 중요한 물건이라 여겨 흥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관지도 없고 내용도 당시(唐詩)를 쓴 것이라 그리 큰 값이 나갈 첩이라 생각하지 않았고, 주인도 그리 생각하여 적당한 값을 내고 샀다. 서울로 오는 기차 속에서 이 첩을 자세히 살펴보고 깜짝 놀랐다. 맨 뒤장에 원교 이광사(圓嶠 李匡師: 1705-1777)의 약간 큰 글씨와 아주 작은 글씨의 발문이 있는데, 그 내용으로 보아 백하 윤순(白下 尹淳: 1680-1741)이나 원교의 글씨가 아니라 소고 서명균(嘯皐 徐命均: 1680-1745)의 글씨였기 때문이다.

또 원교의 발문은 오세창의 『근역서화징』중 ‘서명균’ 조에 실려 있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 첩에는 전문(全文)이 실려 있으나 『근역서화징』에는 발췌하여 실려 있었다. 소고의 글씨가 백하나 원교와 비슷한 것에도 놀랐고, 이 첩이 위창 오세창(葦滄 吳世昌: 1864-1953)이 인용한 바로 그 첩이라는 점에 놀랐고, 서명균은 백하의 제자인 수헌 서무수(秀軒 徐懋修: 1716-?)의 아버지라는 사실에 또 한번 놀랐다.

백하는 숙종과 영조 때를 대표하는 서예가이지만 대대로 문한이 끊어지지 않은 해평윤씨 사람으로 벼슬도 할 만큼 했고 글과 그림에도 조예가 깊은 학자이자 정치가다. 우리 글씨가 그나마 체계적으로 틀을 잡아갈 때 그 바탕을 세운 사람 중에 한 사람이다.

 
우리 글씨가 중국 글씨를 흉내만 내다가 우리 남새를 확실히 낸 사람이 석봉 한호(石峯 韓濩: 1543-1605)다. 하지만 석봉의 글씨는 사자관 글씨의 전범이 되는 바람에 학자들은 약간 꺼리게 되었고 여기에 새로운 기치를 든 사람이 백하다.


조선 후기 대부분의 선비들이 왕희지(王羲之)나 동기창(董其昌) 글씨 위주로 공부하였지만 백하는 동기창과 같은 시대인 문징명(文徵明)의 글씨를 모범으로 썼기 때문에 석봉의 글씨와는 확연히 다르다.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도 백하의 글씨를 이렇게 평했다. “문징명이 작은 해서로 쓴 적벽부(赤壁賦) 탁본첩으로 백하가 오로지 공부하였으니, 그 내려 긋는 획은 짧고 위는 두툼하고 아래는 홀쭉하게 하는 것이 바로 그가 얻은 법이다”
백하 글씨를 보면 추사 지적이 정확한 것 같다. 이 글씨를 본받은 사람 즉 수제자가 바로 원교 이광사와 수헌 서무수다. 원교의 초년 글씨는 거의 스승과 같을 뿐만 아니라 어떤 글씨는 꼭 한 손에서 나온 것 같을 때가 종종 있다. 『근역서화징』 속 ‘서명균’ 조에 “글씨를 잘 썼다(善書)”는 내용과 이 첩에서 발췌해서 옮겨 적은 원교의 발문이 전부다. 아마도 이 서첩으로 인해 소고 서명균 글씨의 제 모습을 볼 수 있고, 잊고 있었던 서명균이라는 작가를 찾아서 서예사의 일부분을 보충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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