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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포럼

선진사회의 조건

이상철 변호사 (법무법인 태평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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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 재직 시절 국가의 배려를 받아 독일로 1년간 연수를 다녀온 적이 있다. 외국 생활에 대한 기대와 설렘은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할 무렵 불안감으로 바뀌고 어찌 어찌 프라이부르그의 집까지 갔던 기억, 혹시나 굶을까봐 미리 보낸 라면 등 생필품 박스는 주인이 오기도 전에 먼저 낯선 땅에 도착하여 문 앞에 자리잡고 있는 것을 보고 실소를 금치 못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낯선 땅에서의 생활이 녹록지는 않았지만 업무 중압감에서 벗어난 해방감, 그리고 독일의 오래된 도심과 천 년전 사람들의 숨결을 느끼게 해 주는 고성(古城)과 성당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내가 머물렀던 프라이부르그는 흑림(black forest, Schwarzwald)에 연한 조용하고 평온한 도시였다. 나이든 운전자가 천천히 차를 운행하여도 뒤에서 경적소리를 내지 않고, 사람이 도로를 건너려고 하면 거의 대부분의 차들이 정차하는 것은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잘 보지 못했던 광경이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독일에서의 생활 중 가장 큰 경험은 ‘선진국이 무엇인가’, ‘선진사회의 조건이 무엇인가’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답을 얻었다는 것이었다. 독일의 유치원은 부모의 경제력에 따라 비용부담에 차이가 있는데,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하고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면서 소득이 얼마라고 적어 내고, 내라고 하는 비용을 납부하였다. 뒤에 내가 말로만 했던 소득 액수를 기준으로 비용이 책정된 것을 알고 순간적으로 더 적게 쓸 것이라는 후회 아닌 후회(?)를 해 보기도 했다. 그 이후에도 여러 번 같은 경험을 하면서 선진국이란 ‘잘 사는 나라’가 아니라 ‘사람의 말을 그대로 믿어주는 나라’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나라라면 어떻게 하였을까? 아마도 근로소득원천징수영수증과 같은 증빙자료를 제출하도록 하지 않았을까.

선진사회는 사회구성원 상호간에 신뢰가 있는 사회이다. 사회구성원들 누구나 정직하게 말을 하는 것, 그리고 누구나 정직하게 말을 할 것이라고 믿는 사회, 그것이 선진사회이다. 구성원 상호간에 신뢰가 없으면 사회질서는 유지되기 어렵고, 상대방의 말이 진실인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검증이라는 절차를 거칠 수 밖에 없게 된다. 사회구성원 상호간의 불신은 불필요한 사회적 비용을 증가시키고, 분쟁을 야기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우리는 과연 그러한 선진사회인가? 대답은 ‘아직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아직 멀었다’가 정답이 아닐까. 정치 지도자들과 사회적 지도층 인사들 중에 우리가 그 말을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최고 정점의 위정자부터 그를 둘러싼 수많은 사람들이 국민 앞에서 버젓이 거짓말을 하는 장면을 우리는 너무나 많이 보았다. 우리 모두가 거짓말에 너무나 익숙하다. SNS와 미디어에 나타나는 일상의 무수한 허위는 우리가 거짓말을 할 권리가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거짓말을 할 수는 있겠지만 거짓말을 할 권리는 없다. 더 늦기 전에 우리 모두가 거짓말의 환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사회 지도층이 먼저 깨어나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비로소 선진사회로 가는 첫 발을 디딜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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