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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언

법치(法治)를 위한 ‘축적(蓄積)의 시간’

이정봉 부장검사 (강릉지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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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서울대 공과대학 교수 26명이 함께 ‘축적의 시간’이라는 책을 출간한바 있다. 전 세계적인 저성장시대를 맞아 우리의 현실을 진단하고, 한 단계 더 도약하기 위한 발전전략을 제시하고자 기획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책에서는 우리의 선진국 모방 및 추격 전략은 한계에 다다랐고, 이제는 고부가가치 핵심기술 개발과 창의적 개념설계(Concept design) 역량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단순히 남을 따라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세상에 없던 것을 창조하고 설계할 수 있는 역량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여러 다른 전문가들에게 듣던 얘기들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책의 ‘미덕’은 그러한 역량이 당위성과 방향제시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숱한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경험과 지식이 축적되는 시간과 함께한다는 지극한 ‘상식’을 석학들의 일이관지(一以貫之)로 들려준 데에 있다.


‘축적의 시간’의 법칙은 비단 산업기술 분야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가 문화의 진화를 매개하며 세대를 거쳐 전달되는 비(非)유전적 요소인 '밈'(meme)이라는 개념을 주장한 것처럼, 법치와 민주주의 등의 사회시스템도 시행착오를 거쳐 경험과 지식이 축적되면서 이상적 모델을 구축할 수 있는 설계역량이 배양되어 나가는 것이 아닐까. 법치를 위한 사회제도의 실패와 오류, 그리고 이를 바로잡고 개선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구성원들에게 아픔과 상처를 남기고 적지 않은 사회적 비용을 수반하겠지만, 동시에 바람직한 선진 법치 시스템을 설계하는 역량이 움트고 있는 창조의 시간임을 기억해야 할지 모른다.


“법의 생명은 이론이 아니라 경험에 있다”는 올리버 웬델 홈즈 대법관의 말처럼, 나이테처럼 켜켜이 쌓여 축적된 우여곡절의 경험과 기억들이, 바람 속에 흔들릴지언정 부러지지 않는 유연하고 단단한 법치의 굳건한 줄기를 만들어 낼 것을 믿는다.

바야흐로, 우리는 법치를 위한 절대시간(絶對時間), 그 ‘축적의 시간’ 속에 있다.
리걸에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