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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포럼

법치주의를 생각한다

이인석 고법판사 (서울고법)

우리는 누구나 '법치주의'를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며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 의미와 내용을 들여다보면 각기 천차만별이다. 권위주의 정부에서는 법치주의를 억압적 규제의 수단으로 이해한다. 중국의 리슈광(Li Shuguang) 교수는 "중국 지도자들은 법의 지배(rule of law)가 아니라 법에 의한 지배(rule by law)를 원한다. 법의 지배는 법으로 권력의 남용을 견제하는 데 기여하지만, 법에 의한 지배는 법적 방법으로 자유를 억압하는 데 활용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지적한다. 우리나라는 19세기 말에 이미 서구의 법치주의를 접했지만, 일제강점기 이후의 법치주의는 일제식민통치의 억압 수단 중 하나로 이용됐다. 이러한 '법치주의'가 근대적 법치주의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자유주의 확립에 기여하지 못한 것은 당연하다.

법치주의 이론의 주요 관심사는 법의 지배 아래 정부를 두어 정부의 전횡을 예방·견제하는 데 있다. 이는 고대 아테네로부터 중세를 거쳐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정부의 작용에 법에 의한 한계를 설정하려는 시도는 사회, 문화, 정치, 경제 분야 등 다양한 영역에 걸쳐 이뤄져왔다. 법치주의를 '정부의 권한 행사에 법적 한계를 설정하는데 기여하는 것'으로 보는지, 반대로 '법에 의하여 국민의 권리를 제한하는 원리'로 보는지는 민주사회와 그렇지 않은 사회를 구별하는 중요한 척도가 된다.

우리사회는 그동안 법치주의를 법에 의한 지배(rule by law) 측면에서만 바라보고 정작 법으로 정부의 전횡과 지도자의 지배를 견제하는 역할을 소홀히 했다. 그 결과 정부를 구성하고 운영하는 특정 지도자의 잘못이 국가의 근본을 흔들 수 있는 여지를 제공했다. 헌법과 법률이 정한 공식적인 기구 대신 이른바 '비선실세'가 국가의 운영을 좌지우지하고, 심지어 사법부를 길들여 삼권분립을 형해화하려는 헌법 파괴적 시도까지 했다는 내용이 보도되고 있다. 이러한 위기의 해법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제시된다. 이때 법률가들이 이야기할 수 있는 해법은 법치주의를 허문 인적 지배를 또다른 인적 지배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법치주의를 확립하는 것이다. 괴물과 맞서 싸우기 위해 괴물이 되면 괴물이 죽은 후에도 괴물은 남는다. 국민이 위임한 권력의 사적인 남용을 막을 수 있는 투명한 장치를 확립하지 못한다면 광화문을 가득 메운 시민들의 함성이 잦아 든 뒤 또다시 권력 남용의 역사가 반복될 것이다. 국가적인 위기 상황을 슬기롭게 극복해 나가기 위해서 법조인들은 현명한 시민들과 함께, 밀실에서 이뤄진 초법적인 사람의 지배에 대항해 투명한 민주주의 절차를 통해 정의를 구현하고 사회를 발전시킬 수 있음을 보여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권력을 사적으로 남용하는 것을 견제하고,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여 민주주의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은 진정한 의미의 법치주의인 법의 지배(rule of law)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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