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나의 문화생활

[나의 문화생활] 케네스 맥밀란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보고

진형혜 변호사 (법무법인 지엘)


흔하면 설레이지 않고 설레인다면 결코 흔할 수 없는 것. 하지만 이 모순된 두가지 느낌을 하나에 담아낼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바로 첫사랑이 아닐까. 누구나 인생을 살면서 한번은 경험할 첫사랑. 그리고 그 첫사랑의 느낌은 단연 설레임이기에.

끝나지 않을 것같이 이어지던 폭염에 탈진할 무렵 갑자기 하룻밤 사이에 밀고 들어온 가을이 어리둥절하다. 마치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하고 돌아본 순간 저 머얼리 서 있던 친구가 한순간에 나의 코 앞에 서서 나를 놀래키는 느낌이 이럴까. 그렇게 한순간에 다가온 가을이 어느덧 깊어갈 무렵 케네스 맥밀란의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 소식이 들려왔다. 그것도 케네스 맥밀란의 영원한 뮤즈이자 줄리엣의 현신이라 불리우는 알레산드라 페리의 무대라니... 알레산드라 페리. 영국 로열발레단, 미국의 아메리칸 발레 씨어터, 이탈리아의 라 스칼라 발레단 등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발레단의 수석무용수로 20세기 후반을 화려하게 수놓았던, 그야말로 세계 발레무대에서 첫손 꼽히던 발레리나이다. 1963년생인 그녀는 2007년, 44세의 나이로 은퇴했지만 그로부터 7년이 지난 2013년에 다시금 무대로 돌아왔다. 그것도 감독이나 안무가가 아니라 무대에 오르는 현역 무용수이자 주인공으로. 2016년 올해 나이로 54세가 된 알레산드라 페리가 복귀작으로 16세의 로미오와 사랑에 빠진 14살의 줄리엣이 되어 풋풋하고 가슴 시린 비운의 첫사랑을 연기한다는 것만으로도 공연계에서는 이미 대단한 관심과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러시아의 작곡가 세르게이 프로코피에프가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원전으로 한 발레음악을 작곡한 이후 루돌프 누레예프와 존 크랑코 등 전 세계 유수의 안무가들이 프로코피에프의 음악을 배경으로 다양한 버전의 발레작품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그중에서 케네스 맥밀란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작품의 시대배경에 가장 충실하고 또한 가장 드라마틱한 작품이라는데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이견이 없다.

3막 13장, 165분(2시간 45분)이라는 긴 호흡으로 진행된 이 공연의 압권은 1막 마지막 장. 서로를 본 그 순간부터 첫눈에 사랑에 빠진 로미오와 줄리엣이 달빛을 받으며 사랑을 속삭이는 장면이 너무나도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파드 뒤(남녀 2인무)와 마지막 3막 4장, 캐퓰릿가문의 가족묘지에 안치되어 있는 줄리엣이 죽은 것으로 알고 로미오가 가사상태의 줄리엣을 안고 추는 비통과 광란의 2인무이다. 1막의 마지막 장, 달빛 아래에서 로미오와 2인무를 추는 페리는 그야말로 40년의 시간을 뛰어넘은, 첫사랑의 행복감과 수줍은 설레임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14세의 줄리엣 그 자체였다. 갸녀린 그녀의 몸과 수줍고 행복해 어쩔 줄 모르는 어린 연인만이 지을 수 있는 표정은 정녕 줄리엣의 현신이라는 세간의 평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확인하여 주었고 사랑하는 연인의 품에 시신(정확히는 가사상태에서)으로 안겨서 추는 마지막 2인무는 말이 아닌 몸이 전하는 비통함과 처연함이 얼마나 더 극적일 수 있는지 절절히 웅변하고 있었다.

나이 어린 연인들의 풋풋한 사랑에 미소짓고 그 연인들의 비극적 죽음에 눈물 흘리며 손바닥이 아플 때까지 박수를 보낸 다음 공연장을 나오며 옆에서 걸어오는 아들에게 던진 한마디. "내일 갈 학원 숙제는 다 했니?" (참고로 아들은 줄리엣과 동갑내기다)
미국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