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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술 이야기

(66) 봉래 목판서첩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봉래 양사언(蓬萊 楊士彦: 1517-1584)은 조선 중기 분이지만 이상하게도 초기 사람 같은 생각이 드는 분이다. 아마도 그의 행동거지가 초기의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 1435-1493)이나 북창 정렴(北窓 鄭렴: 1506-1549) 같은 느낌이 있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글씨도 같은 시기의 옥봉 백광훈(玉峯 白光勳: 1537-1582)이나 고산 황기로(孤山 黃耆老: 1521-?) 와는 달리 더 오랜 글씨의 느낌이 든다. 이는 지역이나 어울리는 사람의 탓도 있겠지만 아마도 기질적인 탓이 가장 클 것이다.

고려 말부터 조선 초기까지 유행했던 송설 조맹부(松雪 趙孟?)의 송설체가 매우 생동적이고 활달하여 사람으로 치면 팔등신에다가 사교성이 좋은 사람이라 할 수 있어 웬만큼 글씨를 잘 써도 이 분위기를 넘기 어렵다. 한데 봉래의 글씨는 짜임새는 조금 떨어질지 모르지만 활달한 기상은 중국 그 누구도 흉내내기 힘들다. 이는 대부분의 서예가들이 중국이나 우리나라를 막론하고 왕희지(王羲之)나 구양순(歐陽詢), 안진경(顔眞卿) 등 모범이 되는 글씨를 밑에 깔고 있기만 하지, 이를 토대로 쓰는 이의 개성 있는 글씨를 덧 부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봉래의 글씨는 일반적으로 쓰는 방필(方筆), 즉 각(角)이 진 모난 글씨가 아니고 원필(圓筆), 즉 획을 꺾어 쓸 때 모가 나지 않고 둥글게 쓰기 때문에 글자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듯하고, 한 점의 작품으로 보면 더욱더 생동감이 넘친다. 그러나 이런 원필의 글씨는 짜임새가 어느 정도 있어야 멋있지, 조금만 흐트러져도 매우 보기 싫다.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의 글씨와 이런 면에서는 유사하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나라 사람 중에는 원필의 서예가가 거의 없다.

얼마 전 고미술을 수집하는 지인의 사무실에 우연히 들렸다가 여기에 소개하는 봉래 글씨 목판 서첩을 보고 친필은 아니지만 봉래 글씨의 맛을 충분히 느낄 수가 있어 빌려다 몇 일을 보았다. 봉래의 생애가 임란이전이라 전해지는 작품이 워낙 적고 비석(碑石)의 글씨나 탁본첩(拓本帖)도 별로 없어 그의 진면목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 많지 않은데, 이 첩이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 여겨졌다. 누가 왜 만들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봉래시집(蓬萊詩集)에 나오는 시가 세 편이고 자작시라 여겨지는 시집에 실리지 않은 두 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는 목판서첩(木板書帖)이다.

이 서첩은 시를 발굴하는 의미도 있지만, 전해오는 글씨 중에는 매우 좋은 글씨라는데 의미가 더 크다. 다만 친필이 아니라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다. 허나 목판서첩이라 하더라도 이 만큼 활달하고 봉래의 진수를 어느 정도 볼 수 있다는 점에서는 매우 중요한 서첩이라 하겠다.

봉래의 일생이 세상에 구애 받거나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둥글둥글 모나지 않게 살아갔기 때문에 그 삶의 모습이 이 글씨처럼 되어졌을 지도 모른다. 봉래선생은 또 시도 잘 하였고 불학(佛學)과 도학(道學)에도 상당한 조예가 있었다 한다. 다른 이의 기록에 나오는 그에 관한 기록과 그의 시집인 봉래시집 3권만 가지고는 그의 전모를 제대로 보기 어렵지만, 조금 남아있는 글씨와 함께 그를 상상해 볼 수는 있다. 그의 형제인 사기(楊士奇)나 사준(楊士俊), 아들인 만고(楊萬古: 1574-1655)가 어느 정도 봉래의 글씨를 따라 썼지만 글씨란 겉모습만 따라 쓴다 해서 되는 일이 아니라서 그저 미미했고, 봉래의 글씨체는 봉래에서 시작해서 봉래에서 끝을 맺었다.

※ 한시를 일부 한글로 표기한 것은 현행 컴퓨터 상에 사용하지 않는 한자이므로 부득이하게 한글로 표기함. 
미국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