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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를 위한 법의 지배

박한철 소장 (헌법재판소)

법의 지배가 민주주의에 필요한 이유

필자는 지난 9월 태국 헌법재판소의 초청을 받아 방문하여, 태국 헌법재판소장을 비롯한 대법원 부원장, 검찰총장, 국회의원, 감사원장 등 태국의 사회지도층을 대상으로 '민주주의를 위한 법의 지배'라는 주제로 특별강연을 하여 큰 호응을 받은 바 있다.

여기서 필자는 법의 지배가 민주주의에서 반드시 필요한 이유로 크게 두 가지를 언급하고자 한다. 첫째는, 법을 통해 민주적 제도를 보장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데 꼭 필요한 정치적 권리들을 보장함으로써 민주주의가 원활하게 작동하도록 만드는 일과 민주적 질서를 훼손하려는 반민주적 세력으로부터 민주주의를 보호하는 일이 여기에 속한다.

둘째는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인권을 보장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모든 시민들이 평등한 자유인이라는 대전제로부터 연유하는 의사결정방식이다. 따라서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모든 시민의 평등한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시민들이 자유를 누리는 데 있어서 불평등이 생긴다면, 그러한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지속될 수 없다.

오늘날 헌법재판은 한 국가 내의 인권침해에 대한 가장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인권보호 수단으로 발전하였다.

법치국가는 인권이 침해된 개인이 사법적 구제를 받을 수 있는 조치를 마련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헌법상의 인권은 문언 상으로만 존재하게 되며 그 현실에서 규범력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국민의 자유와 인권을 보장해야 할 국가작용이 오히려 헌법상 규정된 기본권을 침해할 때에 그로부터 국민의 기본권과 헌법적 가치를 보호하는 법제도가 필요하다.

이 같은 취지에서 세계 각국의 헌법재판소는 국가가 기본적 인권을 침해받은 국민을 보호하고 권리구제를 도모하여야 한다는 점을 여러 결정을 통하여 확인하고 있다.

헌법재판을 통한 민주주의와 법의 지배 성과

1988년 헌법재판소 창설 이래 지난 28년 동안, 한국 헌법재판소는 과거 군사독재 정부의 유산인 인권을 침해하는 악법에 대한 과감한 위헌선언 및 국민의 기본권을 확고히 보장하는 다수의 결정들을 통하여, 국민의 신뢰를 받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의 헌법재판소는 민주주의의 진전을 위한 각별한 노력을 경주해 왔는데, 국민의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한 주요결정으로는 선거구 인구편차 위헌(1995, 2001, 2007, 2014), 비례대표 선거방식 위헌(2001), 재외국민 참정권 보장(2007)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자유민주주의체제의 핵심적인 자유라고 할 수 있는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는 영화사전검열제도(1996, 1997, 2001, 2005, 2008), 인터넷 실명제(2012), 야간옥외집회금지(2009, 2014) 등에 대하여 위헌결정을 함으로써 한국 민주주의의 수준이 크게 향상되도록 그 토대를 굳건히 한 바 있다.

그리고 헌법이 규정한 민주적 통치 질서의 운용 및 해석에 관하여서도 국회의 법률안 날치기통과 위헌(1997), 대통령을 탄핵하기 위해서는 '중대한' 헌법이나 법률 위반이 있어야 한다는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기각(2004), 헌법질서를 부정하며 폭력적 수단으로 국가기간시설 파괴를 선동하는 등 그 목적이나 활동이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되는 정당을 해산하는 통진당해산결정(2014) 등이 있었다.

한편, 평등한 사회, 민주적 가족제도 구현과 여성권익을 신장한 결정 례로는 호주제 위헌(2005), 부성주의 위헌(2005)이나 부계혈통주의에 입각한 국적법 위헌(2000), 여성에 불리한 군가산점제 위헌(1999, 2006), 외국인 산업연수생 차별위헌(2007), 검사의 수사기록 열람거부(1997), 칸막이 없는 유치장 화장실 운영 위헌(2001) 등을 선언한 바 있었다.

이처럼 헌법적 가치를 구현하는 체계적이고 일관된 헌법 해석을 통하여 공권력 행사를 감시하고 국민의 기본권을 신장하는 헌법재판이 활성화되면서, 헌법에 담긴 민주주의와 법의 지배가 공고화될 수 있었다.

박한철 헌법재판소장이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린 아시아헌법재판소연합 제3차 총회에서 폐막을 앞두고 상설사무국 설치 등의 내용을 담은 발리선언문에 서명을 하고 있다.

한 국가의 헌법재판만으로는 인권보장에 한계

특히, 반인도적 인권침해와 같은 인류의 보편적 인권의 문제에 있어서는 국가라는 경계가 장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한 국가 내 헌법재판기관의 판단은 효력범위의 한계로 제한된 역할을 수행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 국제적 연대의 필요성이 있다 하겠다.

아시아에서는 한국 헌법재판소의 주도로 2010년 7월 자카르타 선언을 통하여 아시아헌법재판소연합(이하, AACC)을 창설하였고, 2012년 5월 대한민국 서울에서 AACC 창립총회가 개최되었다. 처음 7개국으로 출발하였던 AACC는 지금 16개국에 이르고 있다. 이들 AACC를 통하여 아시아 국가들 사이에도 개인의 불가침의 인권을 보장하여야 한다는 보편적인 합의가 이미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이 연합체는 아직 구속력 있는 지역적 인권보장기구로 발전하지는 못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 유럽 및 미주지역, 그리고 아프리카에는 유럽인권재판소, 미주인권재판소, 아프리카 인권재판소 등 지역적 인권보장기구가 운용되고 있다.

유럽인권재판소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지역적 인권보장기구는 각국의 헌법재판기관과의 끊임없는 대화를 통하여 지역 전체의 인권 수준을 향상시키고 인권, 민주주의, 법의 지배에 대한 공감대를 확산시켜 나가고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세계 인구의 60%가 살고 있는 아시아에만 유일하게 지역 차원의 인권재판소가 없다. 아시아 지역의 녹록치 않은 여러 인권상황과 아직까지도 과거 인권침해에 대한 사과와 반성이 미진한 아시아의 비극적 역사를 고려한다면, 이는 너무나 안타까운 현실이다.

아시아인권재판소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서 필자는 아시아에도 지역적 인권보장기구로서 인권재판소가 반드시 필요하고 설립되어야 한다는 제안을 하고 싶다.

그동안 아시아의 헌법재판기관들도 AACC를 통해 헌법과 헌법재판에 관한 서로의 경험과 지혜를 공유하고 정보를 교환하여 왔다. 회원국 헌법재판기관들 사이에 불가침의 인권 보장에 관한 보편적인 합의가 형성되어 있으므로, 아시아 인권재판소의 설립을 논의하기 위한 기초는 이미 마련되어 있다고 본다.

다만, 아시아 국가들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역사·문화·경제적 차이를 고려한다면, 처음에는 어느 나라도 반대하기 어려운 최소한의 기준으로 한정된 인권 목록을 보장하는 인권재판소를 창설하는 것이 유효한 합의를 도출하는 방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아시아 인권보장기구의 신속한 설립을 위하여, 처음에는 아시아 인권재판소의 관할과 청구방식을 제한적으로 설정하고, 점차 확대해 나가는 방안을 구상하고 있다. 먼저 심각한 인권침해에 국한한 좁은 범위의 관할권을 가진 아시아 인권보장기구를 발족시킨 다음, 이후 점진적으로 더 포괄적인 아시아 인권헌장을 마련하여 관할권을 넓혀 나가도록 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세 가지를 둘 수 있겠다.

첫째, 집단 살상의 금지이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후 제정된 최초의 인권 관련 국제협약의 규율 내용이며, 현재 개별 국가의 협약 가입 여부와 상관없이 모든 나라가 반드시 준수해야 해야 하는 대표적인 강행규범이다.

따라서 국민적·인종적·민족적 또는 종교적 집단의 전체 또는 일부를 파괴할 의도로 행하여진, 집단 구성원의 살해, 중대한 신체적 또는 정신적 위해의 야기, 집단 내 출생을 방지하기 위하여 의도된 조치를 취하는 것, 집단 내의 아동을 강제적으로 이동시키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21세기 문명사회에서 용납될 수 없다.

둘째, 인류 역사에서 반복적으로 문제되어 온 여성에 대한 폭력행사를 아시아 인권재판소에서 규율하고자 한다. 물리적인 폭력의 금지뿐만 아니라 성적·심리적·경제적 해악을 초래하는 모든 폭력의 금지를 포함한다. 특히 전쟁이나 내전 및 국지적 무력분쟁의 경우 발생하는 여성에 대한 폭력은 가장 우선적으로 방지되어야 할 인류 공동의 과제이다.

셋째, 또 다른 취약한 집단인 아동에 대한 보호이다. 특별한 보호가 필요한 아동의 매매 및 성매매의 금지, 아동 노동의 금지, 아동 군인의 금지 등이 아시아 인권재판소의 규율이 필요한 시급한 의제이다.

무엇보다 아시아인권재판소가 신속하게 설립되려면 조약의 체결·비준 권한을 가진 각국 정부의 강력한 의지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국제적 연대와 협력 함께하기를 소망

이러한 각국 정부의 강력한 의지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각국 헌법재판기구가 민주주의와 법의 지배를 수호하고, 인권을 보장하는 본연의 사명을 충실히 수행함으로써 그 토대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필자는 아시아의 많은 헌법재판소들이 한국 헌법재판소와 함께 이러한 주요한 역할을 하는데 큰 기여를 하리라 확신한다.

아시아인권재판소가 설립될 때 비로소 일본군위안부사건과 같은 인류사의 비극을 미래지향적으로 방지할 수 있는 토대도 구축될 수 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의 모든 헌법재판소들이 힘을 합쳐, 아시아에서의 보편적 인권 확인과 보장, 민주주의와 평화를 위한 국제적 연대와 협력을 위하여 함께 나아가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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