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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언

바캉스와 법의 부재

이정봉 부장검사 (강릉지청)

바야흐로 휴가시즌, 바캉스의 계절이다.

생각만으로도 업무와 일상의 굴레를 떠나 푸른 바다가 펼쳐진 백사장을 거니는 자유로움이 연상되시는가? 그런데, 불어 'vacance'는 '무엇으로부터 자유'라는 뜻인 라틴어 'vacatio'로부터 유래되었으니, 말 뜻 자체에 '휴가는 자유'라는 등식이 내포되어 있는 셈이다.

'vacatio'로 표현되는 말 중에는 'vacatio legis'라는 캐논법상의 법률용어도 있다. 이는 '법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 즉, '법의 부재(absence of law)'라는 의미로, 법률 공포 후 시행 전의 법적 효력의 공백상태를 의미한다. 우리식으로 치자면 법률 시행 전 경과기간 정도에 해당될 것이다.

묘한 것은 '바캉스'와 '법의 부재'라는 표현이 각각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를 뜻하는 'vacatio'를 교집합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바캉스'는 일상의 굴레로부터 벗어난 자유로, '법의 부재'는 법적 규제로부터 벗어난 일시적 자유로 오버래핑된다.

자유의 의미에서 보면,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는 제약과 규제로부터 벗어난 소극적 상태에 불과하다.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Erich Fromm)식으로 얘기하자면 자유를 얻기는 하였으나, 그 속에서 진정으로 자유를 누리는 적극적 의미의 자유에는 이르지 못한 상태, 그래서 왠지 불안하고 어디론가 도피를 시도하고 있는 단계일지 모른다.

'바캉스'든, '법의 부재'든, 단지 어떠한 제약으로부터 벗어난 상태에 그친다면 자유의 초기버전인 소극적 자유에 머물고 말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바는 보다 업데이트 된 버전인 적극적 자유를 만끽하는 것이다. 일상의 굴레에서 해방된 것에 그친다면 자아의 독립성과 주체성이 들려주는 진정한 자유를 느껴보지 못할 것이다. 법적 규제의 일시적 부재가 주는 해방감만을 누리려 든다면 다가올 법적 제약의 진의를 알지 못할 것이다.

짧은 휴가기간 중에라도 자신의 의지와 결정만으로 어떤 새로운 경험을 해 보는 것은 소극적 자유를 업데이트하는 방편이 될 수 있다. 어쩌면 휴가의 끝자락 즈음에는 인지심리학자들이 주장하듯 그 경험으로 말미암아 진부한 일상에 대한 기시감(旣視感)이 다시금 미시감(未視感)으로 변모할지도 모른다. '법의 부재'로 인한 소극적 자유의 시간에도, 다가올 규제의 의미와 규제의 있고 없음의 차이와 그 규제를 불러온 사회 문화적 배경 등을 곱씹어 보는 것이 보다 높은 버전의 자유에 다가가는 길이 되지 않을까?

바캉스의 계절에, 게다가 논란이 많은 한 법의 시행을 목전에 두고 있는 '법의 부재'의 시간에, 문득 떠오른 어쭙잖은 생각이다.
미국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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