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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술 이야기

(63) 백광훈의 편지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조선중기에 삼당시인(三唐詩人)이라 불리는 시인이 있었다. 손곡 이달(蓀谷李達: 1539-1612), 고죽 최경창(孤竹 崔慶昌: 1539-1583), 옥봉 백광훈(玉峯 白光勳: 1537-1582)이 그들이다.

옛날부터 당시(唐詩), 송사(宋詞), 원곡(元曲)이라는 관행어가 있었다. 당나라 때에는 시(詩)가 유명하였고, 송나라 때에는 사(詞)가 유명하였고, 원나라 때에는 곡(曲)이 유명하였다는 말인데, 사실은 그런 시나 사를 쓰는 뛰어난 사람이 많았다는 이야기다. 조선은 문명의 혜택이 워낙 미미하여 송사나 원곡은 논할 처지도 되지 못하고 겨우 당시나 송시(宋詩)를 논할 뿐이었다. 이들 세 사람은 그 시대에 송시(宋詩)가 인간의 자연스럽고 절실한 감정을 당시(唐詩)만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고 여겨서 당시(唐詩)를 본받아 그 당대의 미미한 시풍(詩風)를 한번 혁신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들이었다. 또 그렇게 힘써 노력을 하였기에 삼당시인의 이름을 얻었다. 이들의 시는 당나라 이태백이나 두보(杜甫)의 시에 끼워 눠놔도 뒤지지 않을 만큼 뛰어났다.

특히 백광훈은 글씨도 잘 써서 당대에 이름을 날렸다. 백광훈의 본관은 해미(海美), 자는 창경(彰卿), 호는 옥봉이며 형인 백광안(白光顔)과 백광홍(白光弘: 1522-1556) 및 종제 백광성(白光城) 등 한 집안 4형제가 모두 글(文章)을 잘 한다는 칭송을 받았고, 아들 송호 백진남(松湖 白振南)과 손자 백상빈(白尙賓) 또한 시와 글씨를 잘 써서 대대로 칭송을 받았다.

옥봉은 특히 해서와 행초(行草)에 뛰어났다. 글씨가 군티가 없이 깔끔하면서도 미려하여 시원한 느낌을 주었으며, 석봉 한호(石峯 韓濩: 1543-1605)의 무게감이 느껴지는 두툼한 글씨나 송설체(松雪體)를 썼던 남창(南窓 金玄成: 1542-1621)의 활달함과는 또 다른, 왕희지체에 힘을 얻어 자로 잰 듯한 짜임새 있는 글씨가 일품이다. 그런데 여기에 소개하는 편지는 아주 작은 글씨인데도 백광훈의 글씨의 깔끔한 모습이 그대로 나타난다.

창경(彰卿) 답장 올림/ 어제 보내신 편지는 마침 출타 중이어서 바로 답장을 올리지 못해 매우 안타깝습니다./ 남쪽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고 하시는데, 이는 제가 지난번에 누누이 말했으나 믿지 않으시니 어쩌겠습니까. 제수씨도 함께 가야 하는 상황에서 반드시 군색하고 긴박한 일이 많을 터여서 몹시 염려됩니다./ 저는 내일 새벽 서울로 떠나기로 결정했습니다. 천리 먼 길을 서로 나눠 가게 되니 이별의 아쉬움을 어찌해야겠습니까./ 내일 새 문 밖 집에서의 작별자리에 갈 수 있을 듯한데, 공께서 만약 오실 수 있다면 제가 발길을 조금 늦춰 기다리겠습니다. 의견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복(服, 상중에 있는 몸) 올림/ 누물(陋物, 자신의 겸칭)이 또 제수씨를 뵙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사람의 일이 이런 것인데 어쩌겠습니까만, 대단히 안타깝습니다.(彰卿拜復/ 昨樞書 適出他未得修復 深恨/ 聞君決有南歸之計 吾言已盡於前日 而不能見信 奈何 小嫂俱行 行李必多窘迫 甚慮甚慮/ 僕明曉定發西行耳 千里分飛 別惟如何/ 明日可能出臨新門外家 敍別爲之 公若欲臨 吾行當小遲而사之 照示謹問/ 服 頓/ 陋物 亦以不得見小嫂爲恨 人事如此 奈若之何 可嘆可嘆)

옥봉은 전라도 장흥에서 태어나 사암 박순(思庵 朴淳: 1523-1589)의 문하에서 공부하였고 양응정(楊應鼎), 노수신(盧守愼)에게서도 수학하였다. 1564년에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을 포기하고 주로 호남에서 시와 글씨로써 세월을 보냈다. 1572년(선조5년) 명나라에서 사신(使臣)이 오자 노수신의 추천으로 백의(白衣)로 제술관(製述官)이 되어 시와 글씨로 사신을 감탄케 했다. 이 편지는 아마 이 때 서울로 올라가면서 가까운 사돈집에 쓴 것 같다. 기인여서(其人如書: 그 사람이 그의 글씨와 같다)란 말이 이럴 때 쓰라는 말인 듯싶다.

 
※ 한시를 일부 한글로 표기한 것은 현행 컴퓨터 상에 사용하지 않는 한자이므로 부득이하게 한글로 표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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