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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생활

[나의 문화생활] 안나 네트렙코의 공연을 보고

진형혜 변호사 (법무법인 지엘)

다사로운 봄 내음을 기대하기엔 다소 성급한 3월 초 저녁. 이른 저녁을 먹고 나선 밤 공기가 싸늘하다. 평소 같았으면 주중 내내 격전을 치러내느라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리고 있거나 외출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발걸음을 재촉할 시간에 오히려 집을 나섰다. 차에서 내린 순간부터 종종걸음으로 걷던 내 발이 언제부터인지도 모르게 뛰고 있다. 수년을 기다려 오던 연인을 만나러 가는 마음이 이럴까.

안나 네트렙코. 주말 저녁의 오롯한 휴식을 기꺼이 반납시킨 것도 모자라 한참 남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주차장에서 공연장까지 적지 않은 거리를 내내 뛰어오게 한 카리스마 넘치는 나의 연인이자 오늘의 주인공이다. 10년 전이던가. 우연히 접한 DVD 속 오페라에서 비올레타의 그녀를 마주했다. 그간 수도 없이 보았던 라 트라비아타였기에 새로울 것 없다 생각했는데 덩그런 소파와 커다란 시계 외에 아무런 소품도, 무대장치도 없는 휑한 무대도 충격이었지만 그러한 무대를 붉은 색 미니원피스와 하이힐을 신고 종횡무진 뛰어다니는 것도 모자라 심지어 소파에 거꾸로 누운 아크로바틱 자세로 엄청난 고음역대를 아무렇지도 않게 소화하는 그날의 비올레타는 정녕 내게 충격과 경악 그 자체였다(실제로 그녀는 11살 무렵 시작한 체조와 농구에서 선수수준의 교육을 받았고 그 과정에서 강도 높은 체력훈련을 병행하였기에 이후 오페라 무대에서 뛰고 구르면서, 심지어 드러눕는 자세에서 노래를 하는 것이 그닥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한다. 필자를 포함하여 전세계 오페라 팬을 단숨에 사로잡은 2005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이후 안나는 전세계 오페라계의 디바로 떠올랐고 현재까지 최고의 소프라노로 군림하고 있다). 그러한 안나 네트렙코를 눈 앞에서 보고 들으며 그녀의 고혹적인 연기를 직접 만난다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뛰었고 결국 주차장에서 공연장까지 한달음에 뛰어온 것이다.

이윽고 시작한 공연. 우리나라에서 처음 갖는 이번 무대에서 안나는 지난 해 말 결혼한 남편 유시프 에이바조프와 함께 그야말로 폭풍과도 같은 존재감을 보여주었다. 1994년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으로 처음 데뷔했을 때의 안나가 벨칸토 리릭 소프라노였다면 어느덧 사십대 중반의 나이에 접어들은 안나는 묵직하고도 드라마틱한 발성과, 배역에 완전히 몰입하는 연기력으로 베르디, 푸치니, 칠레아의 아리아들의 고음역대를 거침없이 소화하며 그녀의 한국 공연을 애타게 기다려 온 그날의 모든 관객들의 탄성을 자아냈다. 2005년도 잘쯔부르크 페스티벌 당시 전세계 오페라 팬들을 한 순간에 사로잡았던 안나의 날씬한 자태와 쨍~ 하게 울려퍼지는 목소리를 기억하는 관객들에게는 출산 이후 다소 몸이 불은 현재의 안나의 모습에서 한때 열정적으로 사랑에 빠졌던 옛 애인에 대한 아련한 미련을 자아낼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의 고혹적이고 농염한 몸짓과 성량, 뇌쇄적인 눈빛은 여전하였고 오히려 그녀의 행보가 토스카, 투란도트, 아이다 등 드라마틱 오페라로 진화하고 있는 중임을 확실히 보여주었다.

개인적으로 그 날 공연의 가장 센세이션한 인물은 안나라기보다 안나와 함께 내한한 그녀의 남편 유시브 에이바조프였다. 사실 유시브 에이바조프의 입장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유시브 에이바조프라는 자신의 이름으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핫한 소프라노인 안나 네트렙코의 남편으로 자신을 떠올린다는 사실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을 터. 더우기 안나 네트렙코와 한 무대에서 듀오로 공연하는 엄청난(!) 행운을 누리는 것이 본인의 실력이 아니라 그녀의 남편이기에 주어지는 것으로 번번이 오해를 받는 상황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예술가로서, 남편으로서 두가지 자존심이 모두 상할 듯하다. 그러나 이날의 공연에서 유시브 에이바조프는 자신이 선 무대가 안나의 남편이기에 받은 어부지리 기회가 아니라 스스로의 실력으로 다진 무대임을 보여주었다. 파바로티를 떠올리게 하는 맑고 깨끗한 목소리와 결코 안나에게 밀리지 않는 절절한 연기력으로 모든 관객들 마음을 흔들어 놓은 유시브를 보며 문득 부부란 인생이라는 여정을 함께 걸으며 같은 곳을 바라보는 동반자라는 당연한 진리가 뇌리를 스친다. 기분좋은 피로감에 젖어 돌아오는 길에 문득 든 생각. 오늘 밤에는 남편과 치맥 데이트라도 한번 해야겠다. 이래저래 행복한 봄 밤이다.
미국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