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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사례

감정에 휩싸여 이성적으로 선택할 화해를 외면한 당사자, 분쟁이전 순수한 심정에 호소… 조정에 갈음하는 결정 유도

민사소송/민사집행

1. 들어가면서

조정실에서는 수시로 선택의 번민이 교차한다. 당사자로서는 전문가라는 이의 말을 들어보면 승소할 것 같기도 하니 시간이 걸리고 힘들더라도 판결결과를 기다릴 것인가 아니면 소요시간과 노력을 줄이는 대신 양보할 것인가를 따져보게 된다. 대개는 경제적 가치를 기준으로 망설이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상대방의 양보 요청을 받고 막상 결단하려 하면 주저된다고 한다. 액수가 적은 사건에서는 그 선택이 간단할 것 같지만 당사자들의 타산감각으론 도리어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드물지 않게 경제적 타산 때문이 아닌 여태껏 쌓여온 감정 때문에 선택을 올바르게 하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감정이 격하면 격할수록 판단력은 흐려지고 호양의 의도는 엷어져 간다.

2. 사건의 개요

가. 건축 수리 등을 업으로 하는 A와 그의 가족 BCD는 조그만 잡화상을 경영하는 E의 가족 F 등과 가까이 거주하면서 비교적 사이좋게 지내왔다. 어느 날 E의 잡화상 점포 수리를 맡게 된 A는 인부 G를 데리고 수리 현장에 가 실내를 치우다가 카운터 책상에 걸려 있던 비닐봉지와 그 속에 든 외국 동전 여러 개를 발견하고 대수롭잖은 것으로 여겨 내용물을 확인함이 없이 G에게 주어버렸다.

나. G는 그 중 일부를 남에게 주거나 방치하여 대부분의 동전이 흩어지고 말았다. 뒤늦게 그 사실을 발견한 E는 그 봉지 안에는 10여 년에 걸쳐 모은 여러 외국 동전들이 들어있고 그 가격은 한 개만도 수십만원 이상을 호가한다면서 찾아서 돌려달라고 강하게 요구했다.

다. G가 그때까지 남아 있던 동전을 E에게 갖다 주었지만 E는 없어진 동전을 전부 찾아오라고 하므로 A는 구하기 쉬운 중국 동전 수십개 5만원어치 정도를 사넣어 반환했다. 그러나, E는 그것은 잃어버린 동전이 아니라면서 계속 원래의 것으로 채워오라고 독촉하였다. 그런데, 어느 나라 어떤 동전이 몇 개 들어 있었는지는 기억할 수 없다고 하였다.

라. 상식선의 금전 배상도 마다하므로 번민하던 A는 E의 가족과 함께 경찰에 출석하여 절도혐의로 조사를 받기 시작하였다. 며칠 뒤 A는 자신의 억울한 처지를 비관하는 글을 남기고 자택에서 자살하고, 뒤이어 A의 유족과 E의 가족은 고성으로 몸싸움을 하여 서로 손해를 입혔다. 이에 A 유족은 E의 가족의 잘못으로 A가 사망하였음을 원인으로 불법행위에 의한 일실 이익, 비용과 위자료 등 수억원대의 손해배상을 청구하였다.

3. 조정과정

가. 1심 법원에서는 원고들의 청구를 전부 기각하였고, 항소심은 심리 도중 상임조정위원에게 사건을 회부하였다.

나. 조정위원은 양쪽의 심경을 당사자 본인과 변호사 대리인을 통하여 시간에 구애되지 않고 상세히 들었다. 쌍방은 조정실에서도 고성으로 언쟁하였다. 원고측의 입장은 처음에는 손해배상 없이는 한 치도 물러설 수 없다고 하였다. 피고측은 자신들은 자살과는 무관하므로 단돈 1원도 배상할 수 없고 사후 폭행을 당하게 되어 도리어 손해배상의 반소청구를 할 것이라고 맞섰다.

다. 개별 면담을 통해 원고 측에게는 갑의 사망은 엄청나게 큰 손해이지만 아무리 큰 손해가 나고 관련자가 있어도 법률상으로 인과관계가 인정되어야만 그들에 대한 배상청구권이 인정된다는 점과 피고측에선들 당시 상황에서 A의 사망을 예상할 수 있었던가를 생각해보도록 안내하였고, 피고측에게는 입장을 바꾸어 자신의 남편이 피해자인 경우를 상상해서 배상문제는 제쳐두고라도 원고 측의 심정을 이해·위로하는 방법을 찾아보게 하였다. 폭행의 손해는 쌍방이 서로 폭행을 하였으니 상쇄될 만하고 그 동안의 비용도 적지 않게 들었겠지만 지금 쌍방이 화해하면 더 이상의 비용, 시간 그리고 노력을 소모하지는 않게 되며 서로의 마음고생도 끝낼 수 있다는 것을 양쪽에 상기시키었다.

라. 수회에 걸친 동석 상담과 대리인들의 설득 끝에 쌍방이 상대방에 대해 지나친 언행을 하였고 서로 잘못한 부분이 있다는 데에는 겨우 동의하게 되었으나 쌍방이 서로 상대방에게 미안한 마음을 분명히 표시하고 분쟁을 끝내자는 권유를 듣고는 절대로 자기 입으로 먼저 사과할 수 없다고 버티었다.

마. 이에 상임조정위원은 적극적으로 서로 사과하는 것은 사실상 어렵다고 보고, 조정위원이 조정에 갈음하는 결정 형식으로 서로 사과하고 소취하와 동의를 하는 방향으로 유도하였는데 쌍방은 응답을 보류한 채 조정실을 떠났다.

바. 상임조정위원은 쌍방이 인식하게 된 법률적 문제, 분쟁이 발생하기 전 상호간의 관계와 분쟁의 진행과정에서 서로의 마음을 아프게 한 점에 대하여 사과하는 마음을 표시하는 내용, 상호 민사소송이나 형사고소 등을 더 이상 제기하지 않는다는 내용과 원고는 당해 소송을 취하하며 피고는 이에 동의한다는 내용의 조정에 갈음하는 결정을 하였다.

사. 이 결정에 대하여 쌍방은 이의를 신청하지 않아 그대로 확정되었다.

4. 이 사건 조정의 의의

가. 분쟁의 본질을 파악하고서도 이를 명시적으로 인정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자존심을 지키고자 하는 것이 그 큰 이유일 경우가 없지 아니하다. 이러한 사건의 경우 감정에 휩싸여 이성적으로는 선택하여야 하는 화해의 길을 외면하게 된다.

나. 이 사건은 감정에 휩싸여 화합을 선택할 수 있는 거리를 좁히지 못하고 있는 당사자들에게 조정에 갈음하는 결정을 활용하여 분쟁 이전의 순수했던 심정에 호소함으로써 서로 상대방의 마음에 거슬리지 않는 양보의 끈을 잇게 해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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