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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판례

중재절차의 선행조건이 지닌 법적 함의에 관한 홍콩 고등법원 판결

- C v D [2021] HKCFI 14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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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최근 홍콩특별행정구 1심 법원(“고등법원”)은 C v D [2021] HKCFI 1474 사건에서 “escalation clause”에 관한 중요한 선례를 확립하였는바, 중재를 통해 분쟁을 해결하려 하는 국내외 당사자들에게 유의미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홍콩 법원은 대상판결을 통해 수십 년간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독립성 및 중재친화적인 태도를 유지할 것이라는 점, 아울러 국가 보안법 제정 및 반정부 시위 등 2020년 홍콩에 닥친 여러 시련에 불구하고 홍콩을 중재지로 한 중재절차가 원활하게 진행될 수 있으리라는 점 등을 재확인하였다고 본다.


2. “ESCALATION CLAUSE”의 의미 및 중요성

중재가 최종적인 분쟁해결 방법일 경우, escalation clause란 중재를 개시하기에 앞서 우선 당사자들로 하여금 체계화된 협상, 조정 또는 전문가 결정 등 기타 대체적인 분쟁해결 절차에 따라 일련의 단계를 거치도록 하는 의무(내지 선택권)를 명시한 규정을 가리킨다. Escalation clause의 장점은 당사자들이 정식으로 중재를 제기하기에 앞서 거쳐야 할 단계적인 해결 방식을 사전에 계획함으로써, 당사자들이 분쟁 개시단계에 더 많은 통제력을 행사하도록 하고 이를 통해 (고비용의) 중재절차를 피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 볼 수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어느 분쟁이건 미리 그 양상을 예측하기는 본질적으로 어려운 법이다. 이에 당사자들이 escalation clause상 규정된 대체적 분쟁해결 절차를 모두 거치지 않은 채 중재절차를 개시하는 경우도 상당히 자주 발생한다. 이러한 경우 피신청인은 신청인이 escalation clause를 준수하지 않았음을 들어 관례적으로 관할항변을 제기하여 왔다.

해당 이슈는 다수의 이해관계인이 참여하고, 다양한 분야에 걸쳐 수백 개의 쟁점들이 발생하여 각 쟁점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마저 쉽지 않은 대형 국제건설 프로젝트에서 특히 반복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더라도, 당사자들은 중재를 통하여 해결하는 것이 적절할 수 있는 일부 사안들에 대해서는 종종 중재를 개시하게 된다. 이 경우 프로젝트의 진행과정에서 해당 클레임이 어떻게 진전되었는지에 따라, 각 클레임 별로 일일이 해당 계약상 규정된 escalation 절차를 거친 뒤 중재를 개시하기 어려울 수 있다. 예를 들어 신청인은 특정 클레임이 기존 중재절차에서 다루고 있는 클레임과 관련성이 있다거나, 악화된 당사자들의 관계를 고려할 때 협상 등 중재 전 선행조건을 거치는 것이 실질적으로 아무런 효용이 없으리라는 전제 하에 추가 클레임을 escalation 절차를 거치지 않은 채 기존 중재절차에 바로 병합하려 할 수도 있다.


3. C V D [2021] HKCFI 1474 사건에서 홍콩 고등법원의 판단
3.1 문제의 소재

피신청인이 escalation clause를 준수하지 않은 채 중재가 개시된 점을 들어 중재판정부의 ‘관할’에 이의를 제기할 경우, 이를 판단하는 중재판정부의 관할결정(decision on jurisdiction)은 원칙적으로 중재지 법원에서 (중재판정취소소송 등의 형태로) 그 효력이 다투어질 수 있고, 결과적으로 이는 절차지연 및 당사자들의 비용 증가로 이어지게 된다.

3.2 사건의 경과

그러나 이는 C v D [2021] HKCFI 1474 사건에서 홍콩 고등법원의 판단을 통해, 홍콩을 중재지로 하는 중재절차에서는 더 이상 우려할 요소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C v D [2021] HKCFI 1474 사건에서 문제된 분쟁해결조항은 escalation clause로서 당사자들이 “협상을 통하여 자신들의 분쟁을 신의칙에 따라 신속하게 해결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라고 명시하면서, 구체적으로 “일방 당사자는 상대방에 대한 서면 통지에 의하여 당사자들의 최고 경영자에 해당 분쟁을 위탁하여 해결할 수 있다”고 규정하였다. 또한 해당 분쟁이 “일방 당사자가 서면으로 협상을 요청한 일자로부터 60영업일 이내에 원만하게 해결될 수 없는 경우,” 중재에 회부되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C v D [2021] HKCFI 1474 사건의 원고(중재절차상 피신청인)는 해당 분쟁이 당사자들의 각 최고 경영자에게 회부되지 않은 점을 들어, 피고(중재절차상 신청인)가 중재 개시 전 선행조건을 준수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 중재판정부의 관할이 없다고 항변하였다. 중재판정부는 해당 관할항변을 배척하면서 피고가 해당 조항을 준수하였다고 판단하였는데, 원고는 홍콩 중재법 제81조(Cap 609)에 근거하여 위 관할결정에 대한 취소를 구하였다. 참고로 이 조항은 UNCITRAL Model Law 제34조를 반영한 규정이다.

3.3 법원의 판단

홍콩 고등법원은 대상판결에서, 중재절차에 대한 선행조건이 이행되었는지 여부는 “관할”에 관한 사안이 아닌 “청구적격(admissibility of claims)” 의 문제이기에, 법원은 중재판정부의 관련 결정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하였다. 중재판정부의 관할은 중재판정부가 사건을 심리할 수 있는 “권한” 유무에 관한 사항이므로 법원의 심사가 허용되지만, 청구적격은 중재판정부가 특정 시점에 해당 사건을 심리하는 것이 적절한지 여부를 가리키는 개념으로서, 본질적으로 중재판정부가 법원의 개입 없이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절차적 사안이라는 입장을 취하면서, escalation clause 준수 여부를 청구적격의 문제로 본 것이다.

또한 홍콩 고등법원은 이러한 접근법이 일반적으로 국제적인 중재 커뮤니티 및 각 국가의 법원들이 취하고 있는 관점과 일치할 뿐만 아니라, 홍콩의 중재 친화적 정책과도 일맥상통한다고 판단하였다.


4. 홍콩 고등법원 판결(C V D [2021] HKCFI 1474)의 함의

C v D [2021] HKCFI 1474는 국제중재분야에서 환영할 만한 진전에 해당한다. 아울러 대상판결은 실질적으로 중재를 활용하는 당사자들에게 큰 영향을 줄 것으로 판단된다. 대상판결의 주요 함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a.
중재절차의 선행 조건이 충족되지 않았다는 주장에 당면한 당사자들은, 중재판정부의 결정이 해당 사안에 대한 최종적인 판단이고, 해당 결정이 추후 법원의 심사로 인해 뒤집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점(따라서 중재절차에 대한 불확실성이 감소한다는 점)을 기대할 수 있다.

b.
중재판정부가 단계적 분쟁해결 조항상 선행조건이 충족되지 않았다고 판단할 경우, 신청인은 중재판정부에 당사자들이 선행조건 미준수의 하자를 치유할 때까지 중재절차의 전부 또는 일부를 정지(stay)하는 명령을 내려 줄 것을 요청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신청인이 당사자들의 악화된 관계를 고려할 때 escalation clause 준수를 강제하는 것이 실질적으로 무용하다는 점을 입증할 경우, 중재판정부는 진행 중인 중재절차를 일괄적으로 종료시키기보다는 절차의 정지(stay) 신청을 인용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할 가능성이 높다.

이는 국제거래에 참여하는 한국 기업들에게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합작투자, 에너지 분야에서의 장기계약 또는 대규모의 EPC 사업에서 escalation clause는 전형적으로 등장하는 조항 중 하나이다. 따라서 escalation clause 관련 문제를 청구적격 문제로 분류한 홍콩 고등법원의 접근방식은 중재절차의 불확실성을 감소시킨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사업이 한창 진행 중인 상황에서 중재가 개시되어야 하는 경우, 분쟁의 양상이 지속적으로 변화하고, 이로 인해 당사자들이 단계적 분쟁해결조항을 운용하는 것이 복잡해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C v D [2021] HKCFI 1474 판결에 따르면, 중재판정부의 escalation clause 관련 결정은 법원의 심사대상이 아니므로, 결과적으로 해당 이슈에 관한 중재판정부의 판단에는 상당한 재량이 인정된다. 따라서 홍콩을 중재지로 한 중재판정부는 escalation clause 위반을 판단함에 있어, 당사자들의 관계, 클레임 진행 상황 및 현실적인 여러 사정을 감안하여 적절한 진행방식을 판단할 수 있게 될 것이다.

2020년을 기준으로 한국 당사자들은 홍콩국제중재센터(HKIAC)의 이용자 순위에서 말레이시아, 영국 및 UAE 보다 앞선 7위를 차지하였고, 해당 중재사건들의 대부분은 중재지가 홍콩이었다(2020년 시작된 전체 중재사건의 99.4%). HKIAC의 적극적인 이용자인 한국 기업의 입장에서, 홍콩 고등법원이 제공하게 될 법적 안정성은 아태 지역에서의 중재지 선택에 있어 긍정적으로 의미 있는 고려 요소가 될 것으로 보인다.



방형식 외국변호사(법무법인(유한) 태평양)

※ 이한길 변호사와 공동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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