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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논단

외국법제로의 과도한 도피와 국제사법적 사고의 빈곤

석광현 교수(서울대 로스쿨)

Ⅰ. 머리말

한국은 2007년 알코올 도수 20도가 넘어 독주로 분류되는 스카치 위스키 330만 상자(1상자=9L)를 수입함으로써 우리보다 인구가 많은 독일(수입량 9위, 인구 8200만명)과 태국(수입량 8위, 인구 6500만명)을 제치고 세계 7위를 차지했는데 이는 폭탄주문화 때문이라고 한다(주간조선 2061호(2009.6.29.), 25면). 누구 말마따나 싱글몰트건 블렌디드건 간에 수입 위스키는 대부분 폭탄주의 뇌관으로 장렬하게 익사할 운명이나 위스키 수입을 통해 우리는 경제위기를 겪는 영국인들을 기쁘게 하고 있다. 그뿐이 아니다. 우리 법률가들과 기업인들은 국제거래는 물론이고 국내거래에서도 종종 영국법(English law)과 영국 법원(또는 중재기관)을 선택함으로써 영국 변호사들을 미소 짓게 하고 있다. 국제계약에서도 우리 기업이 관여하는 한 가급적 한국법을 준거법으로 하고 한국 법원(또는 중재기관)에서 분쟁해결을 꾀함이 바람직하나, 필요하면 영국법을 선택하여 영국에서 분쟁해결을 할 수 있다. 문제는 준거법선택 및/또는 관할합의 외에 외국적 요소가 없는 순수한 국내계약("순수 국내계약")에서도 그런 현상이 발생하는 점이다.

예컨대 한국 기업 간에 체결되는 적하(또는 선박)보험계약, 선박건조계약과 용선계약에서 영국법을 준거법으로 지정하고 분쟁해결을 위해 영국 법원(또는 중재기관)을 선택하는 경우(편의상 "외국법제로의 도피")가 종종 있다. 이는 영국법에 대한 우리 법률가들의 일반적 무관심에 비추어 전혀 뜻밖이다.

이런 일이 발생하는 이유는 우리 법이 기업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탓도 있지만 영국법이 적용되는 국제계약에서 영국 법률가들이 작성한 약관과 계약서를 국내거래에 차용한 탓이나(해외 재보험의 필요도 있다), 근본원인은 우리 법률가들이 준거법과 분쟁해결 조항에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우리 법률가들은 대체로 국제사법, 국제민사소송법, 국제거래법과 국제상사중재법에는 관심이 없다. 전문화와 국제화를 부르대는 로스쿨 학생들도 별 다를 바 없어 보인다. 한-EU FTA의 발효로 법률시장 개방과 영국 로펌의 국내진출이 임박했는데 이대로 간다면 영미 변호사들에게 국제거래 관련 법률시장을 헌납하게 될 것이다. 이하 영국법제로의 도피의 법적 문제를 지적한다.

Ⅱ. 준거법합의의 효력

소송과 중재를 나누어 본다.

1. 소송의 경우

순수 국내계약에서도 당사자들은 영국법을 준거법으로 선택할 수 있다. 우리 국제사법은 당사자자치를 존중하여 이를 허용하나 그 경우에도 우리 강행규정의 적용을 관철한다(제25조 제4항).

예컨대 만일 준거법 합의(또는 그것과 관할합의/중재합의) 외에 외국적 요소가 없다면 영국법을 준거법으로 합의해도 '약관의 규제에 관한 법률'("약관규제법")은 여전히 적용된다.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운송약관과 보험약관 등의 경우 내용통제는 대부분 배제되지만 편입통제는 가능하다. 한국에서 재판하면 그렇다는 말이나 영국법원도 그렇게 할 것이다(로마Ⅰ규정, 제3조 제3항). 외국법의 적용은 여러 가지 어려움을 수반한다. 외국법을 준거법으로 선택하는 많은 우리 법률가들은 그 含意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 외국법을 준거법으로 지정하면 외국법자문사의 업무범위도 그만큼 확대될 것이다.

2. 중재의 경우

국제사법은 순수 국내계약에서 당사자자치를 허용하면서 일정한 제한을 두는데, 중재법의 해석상 더 엄격한 태도를 취할 이유는 없지만 중재에서도 우리 강행법규는 여전히 적용된다고 본다. 중재지가 한국 내라면 그렇다는 말이다.

Ⅲ. 영국에서 분쟁을 해결하기로 하는 합의의 효력

소송과 중재를 나누어 본다.

1. 영국 법원을 위한 관할합의

순수 국내계약에서 외국법원을 관할법원으로 합의할 수 있는지는 논란이 있으나, 필자는 이는 허용되지 않으며 그런 관할합의는 무효라고 본다. 필자는 대법원판결과 달리, 외국법원을 관할법원으로 합의할 경우 그 법원과 당해 사건의 합리적 관련의 존재를 요구하지 않지만, 순수 국내계약에서 외국법원에 관할을 부여하는 것은 그것이 전속관할이든 부가적 관할이든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사자 또는 개인적 이익은 이를 정당화할 수 있으나 법원 내지 국가 이익에 비추어 이를 불허해야 한다. 대법원 판결에 따르면 위 사안에서 외국법원을 위한 전속관할합의는 무효이다. 물론 영국 법원이 효력을 인정하면 재판할 수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그 판결의 승인 및 집행은 거부된다. 한영 간 상호보증의 존재는 영국에서는 명문으로 인정되지는 않고 우리 법원에서도 아직 검증되지 않았다(필자는 긍정하고 싶지만).

2. 영국 중재기관을 위한 중재합의

당사자는 중재지의 선정 시 제한을 받지 않는다. 그렇더라도 순수 국내계약에서 발생하는 분쟁을 영국 중재기관에서(영국을 중재지로 해서) 해결할 이유는 없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영국 변호사로서는 좀 생뚱맞기는 하지만 환영할 것이다. 그러나 이에는 많은 시간, 비용과 노력이 소요된다. 순수 국내계약의 경우 영국에서 영국법을 적용하여 중재판정을 받더라도 아마도 한국에서 집행할 필요가 있을 텐데, 그 경우 '외국중재판정의 승인 및 집행에 관한 1958년 뉴욕협약'에 따라 승인·집행이 보장되지만 우리 법원의 집행판결을 받자면 상당한 시간, 비용과 노력이 필요하다. 더욱이 약관에 의해 중재합의를 하였다면 약관규제법상 그 효력이 부정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Ⅳ. 순수 국내계약의 처리

순수 국내계약에서 영국법제로 도피하는 실무는 우리 법률가들의 업무를 박탈할 뿐 아니라 우리 법률문화의 발전을 저해한다. 영국법을 준거법으로 지정하면서 만연히 영국법, 특히 영국계약법도 한국 계약법과 비슷할 것으로 믿는다면 큰 잘못이다. 영국법을 정확히 알자면 영국 변호사의 도움이 필수적이다. 순수 국내계약에서 이런 수고와 비용을 들일 이유가 없다. 단적으로 순수 국내계약이라면 준거법을 한국법으로 하고 분쟁도 한국에서 소송(또는 중재)에 의해 해결해야 한다. 솔직히 우리가 2001년 시행된 국제사법 개정 시에는, 우리 기업들과 법률가들이 준거법이 가지는 含意를 충분히 깨닫고 합리적인 선택을 해줄 것을 기대했었다. 그러나 작금의 현실은 매우 실망스럽다. 우리 법률가들이 계속 이런 수준에 머문다면, 중국처럼 일정한 계약의 경우 중국법을 강행적으로 지정하고 중국법원을 위한 관할합의와 중국 중재기관을 위한 중재합의를 강제했어야 한다는 비판에 대해 할 말이 없다.

나아가 순수 국내계약, 금융이나 M&A거래에서 우리 변호사들이 준거법을 한국법으로 하면서도 영미법의 개념이나 기법을 도입하고 있다. 이것이 계약자유의 원칙상 허용됨은 물론이지만, 그런 개념이나 기법이 영미법 하에서와 완전히 동일한 법률효과를 달성할 수는 없다. 이런 국내거래의 지나친 영국화 또는 미국화 현상의 제문제를 충분히 검토해서 실무를 개선할 필요가 있는데, 이 과정에서 비교계약법적 연구가 요긴하다.

Ⅴ. 국제계약의 처리

외국적 요소가 있는 국제계약의 당사자들은 물론 영국법을 선택할 수 있다. 당사자의 합의를 존중하고, 신의성실의 원칙에 기초한 법원의 恣意的 介入을 차단함으로써 '형평보다 확실성'을 중시하는 영국계약법의 엄격성은 긴 협상과정을 거쳐 국제계약을 체결한 당사자에게는 큰 장점이다. 또한 영국 법원이 오래 세월 동안 축적한 풍부한 국제거래의 판례는 영국법원을 선택할 충분한 근거가 된다(영국이 UN국제물품매매협약(CISG)에 가입하지 않은 데는 이런 이유도 있다). 영국 법률가와 이런 영국법제의 국제경쟁력을 생각하면 우리는 영국법을 더 연구해야 한다(따라서 필자는 법률가들의 해외연수의 지나친 미국 편중을 경계한다). 하지만 우리 법률가들은 한국 기업이 관여하는 국제계약에서는 한국법을 준거법으로 지정하고 한국 법원(또는 중재기관)에서 분쟁을 해결하도록 노력하고, 한국 기업의 협상력이 뒷받침될 경우 이를 관철해야 한다. 국제계약의 준거법을 영국법으로 하더라도 한국법이 규율하는 사항이 있으므로 각 준거법의 射程範圍를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법률시장의 개방과 변호사들의 국제경쟁이 치열해지는 현실에서(근자에는 국내 M&A 법률시장을 두고 우리 로펌과 외국 로펌이 각축을 벌이고 있다고 한다). 준거법과 분쟁해결의 유치는 한국 법률가의 사활이 걸린 문제이다. 국제계약에서도 합리적인 범위를 넘어 영국법제로 도피한다면 영국 변호사는 웬 봉인가하며 좋아하겠지만 속으로는 비웃을 것이다.

과거에는 계약의 준거법은 계약만을 규율했으나, 우리 국제사법(제32조 제3항)에 따르면 불법행위에 의하여 계약관계가 침해되는 경우 불법행위도 계약 준거법 소속국법에 의한다. 더욱이 영국에서 재판할 경우 불법행위에서도 사전적 당사자자치가 허용된다. 즉 상업활동을 영위하는 당사자들이 자유로운 합의에 따라 계약 관련 분쟁의 준거법을 영국법으로 합의하면 영국법이 계약은 물론 당사자 간에 발생하는 불법행위를 규율한다(로마Ⅱ규정, 제14조 제1항). 이처럼 계약의 준거법 선택은 과거보다 큰 파급효과를 가짐을 유념해야 한다. 실무를 개선하자면 계약의 준거법과 분쟁해결조항에 대한 우리 법률가들의 인식이 전환되어야 한다. 준거법과 분쟁해결조항을 'boilerplate'라고 소홀히 취급할 것이 아니라 순수 국내계약은 물론이고 국제계약에서도 가급적 한국법제에 의하도록 해야 한다.

Ⅵ. 맺음말

여기에서 다룬 쟁점은 우리 법의 적용범위와 우리 법원의 국제재판관할(권)의 범위에 관한 지식과 문제의식이 있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필자의 희망은, 우리 기업들의 국제적 위상이 향상됨에 따라 그들이 관여하는 국제계약에서 가급적 한국법을 준거법으로 지정하고, 한국 법원(중재기관)에서 분쟁을 해결하게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 법률가들이 국제사법, 국제민사소송법, 국제거래법과 국제상사중재법을 연구하고, 국제거래를 규율하기에 적합하도록 우리 법을 발전시켜야 하며(이를 위해 우리는 국제규범을 적극 수용해야 한다),  우리 법원(중재기관)의 국제분쟁 해결능력을 제고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장래 한국을 국제분쟁해결의 허브로 육성하고, 중·일기업은 물론 미·중기업 간 분쟁을 한국에서 해결하려는 꿈이라도 꿔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고사하고, 현재 우리 법률가들은 안마당인 국내계약에서 발생하는 외국법제로의 도피현상을 방조 내지 방치하고 있다. 이를 시정하려면 우리 변호사들의 실력을 키워야 함은 물론이나, 우리 기업들이 한국변호사를 신뢰하고 지원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또한 국가적 지원도 필요하다. 어쨌든 지금은 우리 법률가들이 총력을 기울여야 할 비상시지 감투싸움이나 하고 있을 만큼 한가한 때가 아니다.

미국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