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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논단

민법개정에 대하여

이영준 변호사 (前 한국민사법학회 회장)

본고는 (사) 한국민사법학회와 법무부과 공동으로 개최한 「민법개정,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학술대회에서 한 기조발제 ‘민법개정에 대한 원로 회원의 당부’의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위 학술대회는 2008년 6월19일~20일 부산대학교 법과대학 신관 대강당에서‘한국민사법학회 2008년 하계학술대회’로서 개최되었다.

1. 지난 1999년 민법개정심의위원회의 일을 맡으면서 기본방향으로 생각한 것은 그야말로 당장 불가피한 것만 개정대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민법의 흠결이나 불비한 부분에 대하여 판례가 잘 대처해 오고 있으니 우선은 그렇게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우리 판례에 우리 국민의 법의식이 용해되어 있으니 우리 민법학은 좋든 싫든 그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나는 이미 1970년대「대한민국 판례대전」을 편하면서 믿었고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다. 그래서 ① 판례가 과하게 나간 부분만 바로 잡고 ② 판례가 나갈 우리 민법의 지도 원리를 제시하는데 이번 민법개정에 역점을 두어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여기서 과하게 나간 판례라는 것은 법원이 법의 해석의 한계를 넘어서 입법사항을 건드린 판례중에서 ‘헌법을 최상위 규범으로 하는 우리 전체 법질서(2001다 4878)’에 조화되지 않는 판례를 말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관습상의 법정지상권’이다. 판결은 아무리 동일한 것이 누적되어 견고한 체계를 이루더라도 그 자체로서는 법으로 될 수 없고 그것이 법적 확신을 얻어 우리 전체 법질서에 부합되는 경우에만 관습법으로 될 수 있을 뿐인데 관습상의 법정지상권은 이러한 우리 전체 법질서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판례는 이런 법정지상권을 인정하는 것이 “국민경제에 부합된다”고 판시하고 있지만 그 뿌리는 “조선에 있어서의 일반관습”이라고 판시한 일제 때의 조선고등법원 판례에 있는 것이다.


2. 판례에 의한 법형성의 한계를 의미하는 ‘우리 전체 법질서’라고 하는 것은 민법에서는 ‘지도원리’로 나타난다. 민법중 개정법률안 제1조의 2는 “사람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바탕으로 자신의 자유로운 의사에 쫓아 법률관계를 형성한다”고 규정해서 우리 민법의 지도원리를 명문화하려고 하고 있다. 위 제1조의 2의 신설에 반대하는 견해도 있지만 반대하는 이유를 보면 “이러한 규정내용은 타당하지만 꼭 필요하지 않다” “상징적인 것에 불과하여 신설을 가져올 실익이 없다”는 것이 그 대종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위와 같은 제1조의 2를 신설할 역사적.법논리적.실천적 이유가 있다고 주장하여 왔고 여기서 이를 부연하고자 한다.

회고하건대 그동안 우리는 많은 역사적 변혁을 겪었다. 특히 1945년 일제로부터 독립한 이래 군사혁명 등 여러 우여곡절 끝에 1987년 반독제 민주화운동을 거쳐 자유민주주의적 기본질서가 우리 헌법에 실질적으로 정착되었다고 하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러한 헌법적 발전에 대비하여 민법은 어떠한가. 우리는 일제의 36년간의 강점기간은 물론 해방 후에도 우리 민법이 시행된 1960년 1월1일 전까지 해방된 때로부터 약 15년간 계속 일본 민법을 그대로 의용했다. 결국 우리는 반세기동안 일본 민법의 조문 아래에 있었다고 할 수 있고 이러한 상태는 우리 민법제정 후에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즉 위 새로 제정된 우리 민법도 골격은 물론 개개조문의 표현에 이르기까지 일본 민법을 대체로 답습했다고 아니할 수 없고 우리 민법이 시행된 때로부터 지금까지 거의 반세기동안 혁혁한 발전을 기하여 온 가족법에 비해 민법총칙.물권법.채권법 분야는 일본 민법체계 및 조문으로부터 실제로 얼마나 ‘해방’되었는지는 형언하기 어렵다.

결과적으로 도합 1세기동안 우리 민법조문은 ‘일본적인 것’에 머물러 있다고 하는 사실은 부끄러운 일이나 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일본적인 민법조문에 무엇인가 한국법의 혼을 불어 넣어야 할 것이고 이것은 참으로 시급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그 혼은 ‘우리 전체 법질서’ 즉 우리법의 최고의 가치다. 식민지시대, 외세에 의한 해방, 남북의 분단 상황, 6.25 한국전쟁, 군사정권, 5.10 민주항쟁을 통해 얻은 고귀한 경험에 기초해 생각하건대, 한국법의 최고의 가치는 ‘사람의 존엄’이라 할 것이다. 이것이 위 제1조의 2 신설의 역사적 이유다.

다음은 위 제1조의 2를 신설할 법논리적 이유에 대해 언급하겠다. 전통적으로 우리 민법학은 3단계 지도원리론에 의해 지배되어 왔다. 이에 의하면 “우리 민법은 자유인격의 원칙과 공공복리의 원칙을 최고의 원리로 하며, 공공복리란 최고의 존재원리의 실천원리 내지 행동원리로서 신의성실.권리남용의 금지.사회질서.거래안전의 여러 기본원칙이 있고, 다시 그 밑에 이른바 계약자유의 원칙.소유권 절대의 원칙.과실 책임의 원칙 등의 3대 원칙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통적 견해는 따를 수 없는 것이지만 위 전통적 견해에 따른다 하더라도 공공복리의 원칙을 실현하는 신의성실.권리남용금지.사회질서 등은 민법 제2조, 제103조에 명문으로 규정되어 있는 반면 자유인격의 원칙에 관하여는 이를 실현하는 이른바 ‘실천원리’ 내지 ‘행동원리’를 명문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 전혀 없다. 이를 규정하는 것이 위 제1조의 2이다.

더구나 누차 지적한 바와 같이 공공복리의 원칙은 자유인격의 원칙과 대등한 지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인격의 원칙을 실질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그 범위 내에서만 허용되는 수단적 보조적 지위에 있음에 불과한 것이다. 모든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실현해 주는 것이 공공복리의 원칙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법 제2조와 제3조, 제103조 등은 공공복리의 ‘실천원리’ 내지‘행동원리’로서 자유인격이라고 하는 원칙규정을 전제로 한 예외규정이다. 이 예외규정에 대한 원칙규정이 신설되어야 하고 이 원칙규정은 위 예외규정의 앞에 신설되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민법중개정법률안 제1조의 2 제1항이다.

다음은 위 제1조의 2를 신설할 실천적 이유에 대해 언급하겠다. 사실 우리 민법에 위와 같은 원칙규정이 없고 신의성실.권리남용 금지의 예외규정만 우리 민법 모두에 천명되어 있어, 이것이 자유인격의 원칙에 우선하여 적용되는 원칙규정인 양 모양을 갖추고 있으므로, 위 예외규정 등은 공공복리를 내세워 자유인격을 침해하고, 소유권의 절대.계약자유.과실책임의 원칙을 과도하게 제한하려고 하는 우리나라 일부 학설의 전거가 되어 왔다.

이러한 학설의 예를 들면, 우리 민법에 있어서 공공복리가 최고원리이므로 신의성실 등의 행동원리에 의해 소유권의 내재적 한계를 넘어서 소유권을 제한할 수 있다는 소유권제한론, 법률행위 자유원칙을 과도하게 제한해 실제로는 이를 사실상 부인하는 결과로 되는 법률행위 자유의 수정론, 정형화된 계약에 있어서 계약은 의사표시의 합치에 의하여서가 아니라 제공된 급부를 수령한다는 사실자체에 의해서 성립한다고 입론하여 의사표시 없는 법률행위를 인정하는 사실계약이론, 효과의사는 내심적 의사가 아니라 표시행위에 의해 추단되는 의사라고 하여 사실상 표의자의 의사를 의제하는 표시상의 효과의사이론, 의사능력이 없는 자가 행한 법률행위를 무효로 한다는 것은 의사가 없다는 이유에서가 아니라 그러한 자를 보호한다는 실제상의 근거에 기하여 설명하여 사실상 의사능력제도를 부인하는 결과로 되는 이른바 ‘새로운 행위능력이론’, 하자담보나 표현대리의 책임은 계약이나 수권행위에 귀착되는 의사책임이 아니라 신뢰를 보호하기 위하여 법이 특별히 규정한 특별책임이라는 법정책임론 등이다.

이들 이론은 모두 법률행위에서 의사의 요소를 놀라울 정도로 과감하세 소외시키면서 그 이론을 구축하는 근거로 신의칙을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론은 대체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에 독일에서 강력하게 대두되었던 이론인데 이 이론이 일본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우리나라에도 풍미하게 되었던 것이 사실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위 이론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독일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의 종료와 함께 인간성의 말살로 나치스의 만행을 진심으로 반성한 결과 사람의 ‘자기결정.자기지배.자기책임’을 민법학의 기초방법론으로 내세우면서 고전적 의사주의로 회귀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민법중 개정법률안 제1조의 2와 같은 원칙규정을 둠으로써 민법 제2조 규정의 신의성실.권리남용금지가 예외규정임을 강조하여 그 남용을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삼청교육대 사건, TBC사건 등 이와 비슷한 많은 사건들과 이에 대한 사실상 재판의 거부로 밖에 볼 수 없는 대법원의 민사판결을 기억하고 있다. 이들 사건이 헌법규정이 미비해 일어난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위 제1조의 2의 취지에 동의한다고 하면서도 헌법 등에 이를 연역할 수 있는 규정이 있다는 등의 이유로 이의 명문화에 반대하는 견해는 이러한 점에서도 타당하지 아니한 것이다. 위 제1조의 2의 규정이 헌법과 중복된다면 제2조, 제103조도 헌법과 중복되는 것이다. 중복되더라도 위 규정을 신설해야 하는 이유는 헌법을 민사사건에 직접 적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민사사건에도 헌법의 규정을 직접 적용할 수 있다고 하는 헌법의 제3의 기능론은 그 고향인 서구에서도 이미 쇠퇴되어 따를 바 못된다. 판례가 나갈, 법해석의 최고의 가치 기준을 제시하기 위해서도 위 규정의 신설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3. 끝으로 ‘대개정’에 대해 언급한다. ‘대개정’은 내가 늘 말하는 ‘한국민법의 한국화와 국제화’로 요약되는 것이다. 한국인의 법의식에 부합치 않는 외국법적 잔재를 과감히 불식함과 동시에 이와 병행해 UNIDROIT의 국제상사계약의 원칙(Principles of International Commercial Contract), UN통일매매법(United Nations Convention on Contracts for the International Sale of Goods), 유럽계약법원칙(Principles of European Contract Law), 미국의 통일상사법전(The Uniform Commercial Gode) 등에 부응해야 한다. 법무부로서는 ‘소개정’을 단기간 내에, ‘대개정’을 장기간에 걸쳐서 병행추진함이 바람직하다. 독일곀조壕틒미국 뿐 만 아니라 우리 주변국가 예를 들면 1999년의 중국의 ‘합동법’(우리 계약법에 상당), 일본의 채권법 개정작업도 참고해야 할 것이다.

법무부가 이번 한국민사법학회와 공동으로 학술대회를 개최한 법무부에 대해 감사한다. 이러한 공동학술대회는 한국민사법학회 역사상 처음 있는 일로 기억된다.

미국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