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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례평석

신용장개설은행의 지정은행에 대한 지시의 효력

이헌묵 교수(경북대 로스쿨)

I. 사실관계

석유를 수입하여 판매하는 한국회사 갑은 해외 소재 을로부터 자금을 차입하기로 하였다. 자금차입의 방법은, 갑에게 자금이 필요한 사정이 발생하면 을에게 석유를 수출하는 계약을 체결하고 을이 대금지급을 위하여 신용장을 개설하여 갑에게 보내면 이를 통하여 갑이 자금을 수령하며, 자금변제의 방법은, 갑이 프랑스에 본사를 둔 회사인 병으로부터 석유수입계약을 체결하고 대금지급을 위하여 피고은행으로 하여금 병에게 신용장을 개설하면 병은 자금을 받은 후 을에게 전달하는 방법을 취하였다. 이 과정에 실제로 석유가 수출되거나 수입된 사실은 없기 때문에 신용장대금의 지급조건으로 선하증권이 제시될 수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신용장에는 신용장대금지급조건으로 선하증권대신에 수익자가 작성한 보상장(Letter of Indemnity; 자금이 부족한 수출자가 선적 전에 신용장대금을 수령하고자 향후 발생되는 모든 손해에 대하여 책임을 지겠다고 확약하는 서면)의 제시도 가능하도록 규정하였다. 그런데 피고은행은 이미 병에게 개설하였던 신용장의 보상장지급조건을 변경하고자 이 신용장의 통지은행이자 기존에 발행된 신용장의 매입은행인 원고은행에게 '은행간 지시(bank to bank instruction)'란 제목으로 보상장지급조건을 삭제한다는 통지를 하였다. 이에 원고은행는 수익자인 병에게 이러한 통지를 전달하였으나 병은 조건의 변경을 거절하였고 원고은행은 이러한 사실을 피고은행에게 통지하였다. 그 후 원고은행는 기존의 신용장지급조건에 따라서 병으로부터 선하증권 대신에 보상장을 수령하고 환어음을 매입한 후 피고은행에 대하여 신용장대금을 청구하였다. 그러나 피고은행은 수익자에 대한 관계에서 신용장지급조건을 변경한 것이 아니라 원고은행에 대한 관계에서만 지시한 것이므로 보상장지급조건 삭제지시는 유효하고 따라서 신용장대금을 대금을 지급할 수 없다고 답변하였다. 이에 원고은행은 피고은행을 상대로 신용장대금지급청구소송을 제기하였다.

II. 대법원 2011.1.13. 선고 2008다88337 판결의 내용

국제상업회의소(International Chamber of Commerce)의 제5차 개정 신용장통일규칙 제9조 d항은 '제48조에 의하여 별도로 규정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취소불능신용장은 개설은행, 확인은행(있는 경우) 및 수익자의 합의 없이는 변경되거나 취소되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취소불능신용장에서 규정된 수익자의 권리 또는 권리의 행사요건 등에 영향을 미치는 신용장 조건 등의 변경은 수익자의 동의를 얻지 못하면 효력이 없다. 취소불능신용장의 이러한 조건변경 제한규정은 개설은행이 매입은행 등 지정은행에 대한 지시의 형식을 취하였다고 하더라도 그 지시 내용이 실질적으로 수익자의 권리 또는 권리의 행사요건 등을 변경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고 보아야 하므로 수익자의 동의가 없는 한 그와 같은 지시는 효력이 없다. 왜냐하면 개설은행의 그와 같은 지시가 수익자에 대한 관계에서만 무효이고 매입은행에 대한 관계에서는 그대로 유효하다고 한다면, 매입은행은 개설은행의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고 그에 따라 수익자는 매입은행에게 변경 지시 전의 권리를 사실상 행사할 수 없게 되는 반면, 개설은행은 수익자의 동의 없이 매입은행에 대한 지시를 통하여 취소불능신용장의 신용장 조건을 임의로 변경할 수 있는 부당한 결과가 초래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경우 개설은행은 수익자뿐만 아니라 매입은행에 대한 관계에서도 그 지시의 유효를 주장할 수 없다.

III. 평석

1. 들어가기

이 사건의 쟁점은 신용장개설은행이 신용장을 매입할 수 있는 은행(신용장매입을 수권받은 은행을 '지정은행(nominated bank)'이라고 하므로 이하 '지정은행'이라 한다)에 대하여 일방적으로 한 지시가 법률적으로 어떠한 효력을 갖는가에 있다. 신용장개설은행인 피고은행은 이러한 지시가 유효하므로 지정은행인 원고은행은 이러한 지시에 따를 의무가 있다고 주장한 반면에, 대법원 판결은 신용장통일규칙에서 신용장개설은행이 신용장대금지급조건을 일방적으로 변경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으므로 신용장개설은행이 지정은행에게 일방적으로 한 지시는 수익자의 동의가 없는 이상 아무런 효력이 없다고 보았다. 먼저 결론부터 말하자면 대법원 판결의 결론에는 동의하지만 결론에 이르게 된 근거에 대하여는 다른 의견이다.

2. 준거법에 대한 고려의 부재 

이 사건에서 원고은행은 신용장의 매입은행으로서(실제로 매입하는 것은 신용장에 기하여 발행된 환어음 등 서류이다) 외국에 소재하여 외국적 요소가 있는 사건이므로 대법원은 원고은행과 피고은행 간에 적용될 준거법을 우선적으로 결정한 후 그 준거법에 따라서 당사자 사이의 법률관계를 판단했어야 했다. 하지만 위 대법원판결은 준거법에 관하여 아무런 고려 없이 바로 신용장통일규칙만을 근거로 결론에 이른 아쉬움이 있다. 이 사건에 신용장통일규칙이 적용된다는 점에 대하여는 이의가 없지만 신용장통일규칙이 신용장에 관한 모든 법률적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므로 여전히 준거법의 결정은 의미가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사건 판결이 선고되고 불과 2주 후에 내려진 대법원판결(대법원 2011.1.27. 선고 2009다10294 판결)에서는 "신용장에 기한 환어음 등을 매입하는 매입은행은 신용장 개설은행의 수권에 의하여 매입하긴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자기의 계산에 따라 독자적인 영업행위로서 매입하는 것이고 신용장 개설은행을 위한 위임사무의 이행으로서 신용장을 매입하는 것은 아니므로, 신용장 개설은행과 매입은행 사이의 신용장대금 상환의 법률관계에 관한 준거법의 결정에는 위임사무의 이행에 관한 준거법의 추정 규정인 국제사법 제26조 제2항 제3호를 적용할 수 없고, 환어음 등의 매입을 수권하고 신용장대금의 상환을 약정하여 신용장대금 상환의무를 이행하여야 하는 신용장 개설은행의 소재지법이 계약과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는 국가의 법으로서 준거법이 된다."고 판시하여 신용장개설은행과 매입은행 사이의 법률관계에 대하여는 신용장개설은행의 소재지법이 준거법이 된다고 판시하였다는 점이다(신용장에 적용되는 준거법에 관한 구체적 논의는 "졸고, 화환신용장의 중간은행의 법률관계와 독립적 은행보증의 제2의 은행의 법률관계에 대한 준거법, 국제사법연구 제17호" 참조). 이 대법원판결에 대하여는 전적으로 찬성한다.

3. 신용장개설은행과 지정은행 사이의 법률관계 판단의 부재

이 사건 대법원판결은 원고은행과 피고은행 사이에 어떠한 법률관계가 형성되어 있는지에 관하여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필자는 대법원이 준거법에 근거하여 당사자 사이에 어떠한 법률관계가 형성되어 있는지 우선적으로 분석하고, 이러한 법률관계에 의하면 피고은행의 원고은행에 대한 일방적 지시가 어떠한 효력을 갖는지 판단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이 사건 소송이 진행될 당시에 원고은행은 신용장을 매입하여 지정은행에서 매입은행이 되었으므로 이 사건의 준거법은 대법원 2011.1.27. 선고 2009다10294 판결에서와 같이 개설은행인 피고은행의 소재지법인 한국법이 된다. 이 사건 신용장에서는 제5차 신용장통일규칙(UCP 500)이 적용된다고 명시하고 있었고, 우리 법상 이러한 규정은 유효하므로 제5차 신용장통일규칙이 이 사건에 적용된다. 그런데 제5차 신용장통일규칙 제10조(b)에서는 신용장개설은행이 신용장을 매입할 수 있는 수권행위만으로는 원칙적으로 지정은행은 어떠한 의무도 부담하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즉, 수권행위만으로는 신용장개설은행과 지정은행 사이에 아무런 법률관계가 발생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다음으로 준거법인 한국법에 따를 경우에는 혹시 어떠한 법률관계를 인정할 수 있는지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한국법은 미국법과 달리 신용장에 관한 별도의 법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법의 일반원칙에 따라서 위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다.

4. 신용장개설은행과 지정은행 사이의 법률관계  

앞서 언급한 대법원 2011.1.27. 선고 2009다10294 판결에서는 신용장의 지정은행은 자기의 계산에 따라 독자적인 영업행위로서 신용장을 매입하는 것이고 신용장개설은행을 위한 위임사무의 이행으로서 신용장을 매입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이 판결에 따르면 지정은행이 신용장을 매입하기 전에는 지정은행과 신용장개설은행 간에는 적어도 신용장대금지급과 관련하여 아무런 법률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지정은행이 신용장을 매입하여야 비로소 지정은행은 매입은행의 지위를 얻고 이때부터 양당사자는 법률관계를 맺게 된다(신용장개설은행과 매입은행 간의 법률관계는 신용장수익자와 신용장개설은행 사이의 법률관계와 동일하다. 구체적인 논의는 "졸고, 앞의 논문"을 참조 바란다). 이러한 결론에 따르면 신용장개설은행인 피고은행이 지정은행인 원고은행에게 한 보상장지급조건 삭제지시는 원고은행에 대하여 아무런 효력이 없다. 결국 원고은행이 신용장을 매입한 후 피고은행과 맺게 되는 법률관계는 신용장에 기재에 따르게 되므로 원고은행이 피고은행의 삭제지시에도 불구하고 신용장 기재에 따라서 보상장을 수령하고 신용장대금을 지급한 것은 적법한 지급이 된다. 따라서 피고은행은 원고은행에게 신용장대금을 상환할 의무가 있다.

5. 결론

결론적으로 대법원은 제5차 신용장통일규칙의 신용장대금지급조건 변경에 관한 규정이 아니라 당사자 간의 법률관계의 분석을 통하여 결론에 이르렀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신용장통일규칙의 위 규정도 결론을 지지해 주는 근거가 될 수 있겠지만 주된 이유보다는 부수적 이유에 불과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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